여대생의 나홀로 미국여행3

얼굴에 얼어붙을까봐 못울겠다

2011.04.01 10:56

새벽 4시였다. 버스는 인적도 없는 컴컴한 어둠 속 터미널 앞에 날 토해내고 하얀 매연을 뿜으며 사라졌다. 전날 정오 보스턴에서 출발해 캐나다 온타리오주 나이아가라 폭포 터미널까지 꼬박 19시간이 걸렸다. 잔뜩 웅크린 채로 굳어있던 팔다리가 고단했다. 찬 바깥 공기가 신선하고 반가웠다. 이 시각에 이 곳 터미널에 내리는 승객은 나 하나뿐이었다. 따뜻한 버스 안에서 설핏 들었던 선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추위가 더했다. 문 닫힌 허름한 터미널 앞에 서서 멍청하게 하품을 쩍 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동도 트지 않은 시각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생전 처음 밟는 캐나다 땅에 떨어진 둔한 여자애. 어두컴컴한 터미널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고서야 지금 상황이 심각하긴 하구나 느낀다. 무정히 떠나버린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천만다행으로 택시 한 대가 터미널 옆에서 오도카니 익명의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깜빡 잠이 들어버린 기사 아저씨를 깨워 예약해둔 숙소로 택시를 달렸다. 겁 난 마음에 다소 무례하게 굴었는데도 기사 아저씨는 참 친절했다. 그 밤중에 데려다 준 것이 고마워 14불 나온 택시 값에 20불이나 건넸다. 잔돈 받기가 귀찮았던 탓도 있고, 버스에서 내려 신난 것도 있는데, 아무튼 나중에 캐나다 달러가 부족해 무진 후회했다. 미국 여행 내내 모르는 사람들 여럿과 방을 나눠 쓰는, 이층침대와 공동 세면실을 쓰는 호스텔에서 묵었다. 하지만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딱 하루 날 잡고 건너온 캐나다에서는, 큰맘 먹고 폭포가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1인실을 예약해두었다. 오랜만에 혼자만의 공간을 즐길 생각에 신이 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이제는 쉴 수 있구나 팔랑팔랑 들어간 호텔에서는 4시에나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 시각이 새벽 4시를 갓 지나가고 있으니, 방에 들어가 뜨거운 욕조에 몸을 푹 담그려면 자그마치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망연자실했다. 막바지에 이른 여행이 고달프게 느껴졌다. 느른하게 힘이 빠진 팔다리를 쉬이려면 졸음과 사투하며 반나절을 바깥 어디에선가 보내야 한다. 짐 가방만 데스크에 맡겨두고 축 처진 어깨로 호텔 바깥으로 나왔다.

[여대생의 나홀로 미국여행3]얼굴에 얼어붙을까봐 못울겠다

'살을 에는 추위'가 무엇인지 여기서 알았다. 눈보라가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바깥에 십분만 서 있으면 누구든 생생히 알 수 있다. 패딩점퍼를 입고 털목도리를 두르고 얼굴을 꽁꽁 감싼 뒤, 털 부츠를 신고 가죽장갑으로 무장했지만, 점퍼 밑단부터 부츠가 시작되기까지 허벅지에서 종아리에 이르는 두 뼘 다리는, 애처로운 청바지 한 겹 뿐이다. 더 껴입을 수 없을 만큼 뚱뚱해졌지만 다리만은 맹추위에 훤히 드러나 있다. 정말이지 갈기갈기 찢기는 듯 고통스러운 추위다. 여기 바람은 갈고리 모양인가보다. 참을성이 없는 편이 아닌데도 30분 이상 지나면 어디든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고파 어찌할 줄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한참 나중에 호텔에 들어가서 보니 안 그래도 여행 중 건조한 날씨 탓에 잔뜩 메말라 갈라졌던 종아리 피부가 피를 내며 쩍쩍 벌어져 있었다. 생전 처음 다리에 수분 크림을 바르고 연고까지 덕지덕지 칠을 했다.

눈이 정말 무진히도 온다. 단 1분도 쉬지 않고 눈이 내린다. 하늘이 온통 뿌옇다. 길을 걸으면 눈보라가 얼굴로 몰려 도저히 눈을 뜨고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실내에서 내다보면 바람이 길거리에 쌓인 눈을 휩쓸고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인다.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바람이 하는 것이 전부다. 정말 너무 춥다. 울음이 터져 나오게 추운데 울면 얼굴이 얼어붙을까봐 못하겠다. 카지노를 찾아가려는데 이쪽 길로 가면 나온다 했던 카지노가 보이지를 않는다. 한참을 간 것 같은데 도저히 너무 추워서 이건 무리다 싶다. 새벽에 사람 하나 없는 거리에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혹독한 추위와 바람을 혼자서 목도리를 꼬집어 여미며 견디고 있었다. 다시 길을 돌아왔다. 호텔 앞에서 24시간 운영하는 TGI Friday를 봤다. 나이아가라까지 와서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기는 뭣하지만 선택의 여지조차 없다. 들어서니 커다란 홀에 한 테이블만 차 있다. 비성수기인 겨울, 그것도 새벽 시간에 패밀리 레스토랑이 한산한 것은 당연하다. 프랑스계 관광객인 것 같은데 남자들만 3명, 시끄럽다. 그래도 이 큰 식당에 손님이 나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카운터와 가장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는다. 오래 앉아 있어야 하니까 구석진 곳이 좋다. 바에 앉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오들오들 떨며 들어오던 나를 흘끗 봤던 흑인 아저씨가 다가와 무언가 먹으려는 거냐고 묻는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럼 구걸이라도 하려고 들어왔다고 생각한 걸까?

[여대생의 나홀로 미국여행3]얼굴에 얼어붙을까봐 못울겠다

그런데 이 사람, 여행 중 내가 만난 천사였다.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아직 덜덜 이를 부닥치고 있는 나를 보더니 “따뜻한 마실 것을 먼저 가져다줄까?” 묻는다. 김이 폴폴 나는 따끈한 코코아를 가져다준다. 하얀 머그잔을 쥐고 있으니 언 손이 얼얼하니 덥혀진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꿀꺽꿀꺽 코코아를 마셨다. 몇 분 전 바깥에서 겪었던 곤란이 언제였나 싶게 금방 몸이 풀린다. 어림잡아 세 시간은 앉아있어야 하니 메뉴를 시키긴 해야겠는데 이 새벽에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무얼 먹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배도 고프기에 아주 제대로 먹어보자 결정했다. 피쉬앤칩스와 나이아가라 특산 맥주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다가 흑인 아저씨가 화들짝 놀란다. “캐나다에서는 이 시간에 술을 마실 수 없어! 그리고 너, 몇 살이니?”

음식이 나오는 동안에도 잠시간씩 들러 이것저것 질문을 한다. “어디서 왔니? 여기까지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이 이 여행을 보내주셨단 말이야?” 알고 보니 그는 이 식당의 지배인이다. 이름은 Huch Reid. 자메이카 출신이다. “난 20살이나 됐는 걸요!” 기세등등하게 답하니 나만한 딸이 있다면서 껄껄 웃고 간다. 조용한 나에 비해 한껏 흥겨운 앞의 일행에게 혹시 창피해 하지 않을까 일부러 들러 말을 걸어주는구나. 고마웠다. 이윽고 나온 음식을 먹으며 무료하게 여행 책을 뒤적이고 있으니 다시 다가와 말을 건다. 잠시 쭈뼛쭈뼛하더니 뜬금없이 묻는다. "혹시 컴퓨터를 잘 다룰 수 있니?"

지난 크리스마스 때 본국 자메이카로 간 휴가에서 찍은 사진을 친구에게 보내려는데 잘 전송이 되지 않는다고. 나도 컴퓨터를 능히 다루지는 못하지만, 아저씨가 워낙 지독한 컴맹인지라 으쓱하다. 사진 여러 개를 한꺼번에 보내는 방법을 알려줬더니 눈을 크게 뜨면서 환호성을 지른다. 사진을 빠르게 보내고 싶으면 용량을 줄이면 되고, 용량을 줄일 수 있는 압축 프로그램이 다운받아 쓰면 된다고 일렀더니 도리질을 하며 자신은 45살이나 먹어서 복잡한 건 딱 질색이란다. 이게 얼마 만에 사람과의 대화인지. 여행 내내 꽉 다물고 다니던 입이 한 번 열리자 아주 신이 났다. 잔뜩 움츠러들어 눈치만 보고 다니다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입장이 되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짧은 영어로 주절대느라 먹고 있던 음식은 퍽퍽하니 다 식어 버렸지만 그래도 기분은 대단히 뿌듯하고 우쭐하다.

Reid는 자꾸 나를 '상즌'이라고 부른다. 내 이름 상은, Sangeun을 종이에 써 주었더니 두어번 고쳐주어도 계속 '상즌'이라고 부르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흰 이가 환히 드러나는 멋진 미소가 매력적인 그가 친근하게 느껴져, 왜 이 시간에 패밀리 레스토랑에 온 거냐는 질문에 난처한 지금 상황을 구구절절 호소하고 말았다. 새벽 4시에 터미널에 내려 호텔에 갔더니 체크인 시간까지 12시간이나 남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어 추위 속에 헤매고 다니다가 불이 켜져 있어 들어왔다고. “네가 원하면 언제까지든 여기 있어도 좋아! 아무도 네게 핀잔을 주지 못하도록 할게.” 따뜻한 말에 마음이 스르르 편안해진다. 지배인이라 바쁜 그를 대신해 고맙게도 내 또래 직원을 불러주었다. 막 출근하자마자 불려온 직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혼자 있는 것이 민망해지지 않도록 여기서 얘기를 함께 나눠달라고 한다.

검은 머리와 빨간 유니폼, 생글생글한 웃음이 참 잘 어울리는 Joanne는 싹싹하고 유쾌했다. 22살의 그녀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용돈 벌이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다. Joanne의 부모님은 폴란드에서 캐나다로 건너온 이민자다. 그녀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이 곳 국적을 가지고 있고, 온타리오에서 나고 자라 완전히 캐나다 사람이지만 폴란드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다. 자신의 폴란드어 실력이 혼자 폴란드에 떨어져도 겨우 먹고 살 방도를 구할 정도는 된다며 웃어보였다. 그녀가 관심이 있는 한국의 식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Reid가 다가온다. "상즌!" 자메이카를 떠올리면 알록달록한 전통의상과 쿵쿵 하는 레게 음악, 자메이카가 원산지인 블루 마운틴 커피가 생각난다. 하지만 Reid는 파랑 체크무늬 와이셔츠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이다. 볼펜 한 자루를 와이셔츠 앞주머니에 꽂아 넣은 세련된 그의 차림에서 내 관념 속 자메이카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의 취미는 자동차 박람회를 구경하는 것이다. 스포츠카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 컴퓨터 속 앨범은 온통 번쩍번쩍한 신형 차들 사진으로 가득했다. 내게 보여준 자신의 차도 매끈한 스포츠카였다. 자메이카에 대해 알고 있냐는 그의 물음에 소울 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하자 갸우뚱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가 궁금해 하는 북한의 미국인 납치 문제에 관해 답하다 보니 어느덧 창밖이 밝아온다. "그런데 상즌, 너는 북쪽에서 온 거야? 남쪽에서 온 거야?"

[여대생의 나홀로 미국여행3]얼굴에 얼어붙을까봐 못울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Reid가 커다란 커피를 양 손에 쥐고 온다. 사진 보내는 것을 도와준 것이 고맙다며 바깥은 아직 추우니 마시면서 가라고 한다. 패밀리 레스토랑 로고가 쓰인 박하사탕 세 개도 함께 건넨다. 떠나기 전에, 손님을 맞으러 가면서 절대 인사 없이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한 Joanne를 기다려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서 식당 종업원과 굳이 기념사진을 남기던 외국인 관광객들을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나지만, 이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외롭고 난처한 일투성이인 타지에서, 마음이 따뜻함으로 철벅철벅 넘치는 이런 순간은 정말 흔히 오지 않는다.

하룻밤이 지나고 지긋지긋하게 춥던 나이아가라 폭포를 떠나오던 길, 택시 기사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이렇게 춥고 혹독한 곳에서 눈과 얼음과 사람과 평화롭게 살고 있는 나이아가라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곳이라고. 고향 파키스탄을 떠나와 폭포 언저리에 자리를 잡고, 드디어 지난달 캐나다 시민권을 발급받았다고 환하게 자랑하던 아저씨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강물에는 얼음이 살벌하게 찬 기운을 뿜으며 둥둥 떠다니고, 잘못 발을 내딛으면 허벅지까지 쌓인 눈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마는 곳.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내려 고운 눈길 밟기를 누구도 선수 쓰려 하지 않는 곳. 하루라도 눈 쓸기를 게을리하면 집 대문을 열 수도 없게 눈이 쌓이는, 꾀죄죄한 자동차들이 지붕엔 눈을 그대로 얹은 채 앞 유리만 겨우 닦인 모양으로 길을 다니는 곳. 그래도 여행 중 만난 가장 마음 따뜻한 만남이 거기에 남아 있었다.

이상은/인터넷 경향신문 대학생 기자 (웹場 baram.khan.co.kr)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