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놀래킨 ‘전봇대 사고’가 마을공동체 씨앗으로… ‘독산4동의 실험’

2016.03.01 16:43 입력 2016.03.01 16:49 수정

서울 금천구 독산4동에서 발생한 ‘전봇대 사고’ 사흘 후인 지난 1월18일 오후 독산4동 주민들이 동주민센터에 모여 사고 피해보상 등 사후 조치를 추진할 대책위원회 구성을 위한 주민총회를 열고 있다. 서울 금천구 독산4동주민센터 제공.

서울 금천구 독산4동에서 발생한 ‘전봇대 사고’ 사흘 후인 지난 1월18일 오후 독산4동 주민들이 동주민센터에 모여 사고 피해보상 등 사후 조치를 추진할 대책위원회 구성을 위한 주민총회를 열고 있다. 서울 금천구 독산4동주민센터 제공.

서울 금천구 독산4동 27·28통은 다세대·다가구 주택이 빼곡히 자리잡은 동네다. 언덕진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밥벌이에 바빠 이웃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다. 주거환경도 취약했다. 구석진 골목 전봇대마다 쓰레기가 쌓이고, 어두운 밤길은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난 1월15일 이 골목에서 인근 공사장을 오가던 레미콘 차량이 전봇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 일대 250가구 가량이 한꺼번에 단전됐다. 이 사고로 어떤 집은 불이 났고, 어떤 집들은 보일러가 고장나고 집 안에 물이 찼다. 혹한 속에 덮친 악재였다.

하지만 이 ‘전봇대 사고’는 골목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왔다. ‘전봇대 사고’로 주민들이 만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사고 사흘째인 지난 1월18일 주민총회를 열었다. 총회에서 주민 대표 6명을 뽑아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대책위가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레미콘 차량 업체 측과 피해복구를 위한 협상을 벌였다. 레미콘 차량 업체에서 보일러 등 설비 복구, 골목길 정비 등을 보험으로 처리했고, 피해보상금으로 2000만원을 지급했다. 주민 대표를 통하자 개개인이 동주민센터나 레미콘 차량 업체를 찾아가 대응하는 것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보일러 파손 수리 및 교체는 3일 만에, 화재 가구 피해복구는 일주일 만에 해결됐다. 총 250가구의 피해 민원이 한 달 안에 모두 해소됐다.

이 사고로 주민들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주민 이길연씨(67)는 “예전에는 동네 사람 얼굴도 잘 몰랐는데 이제는 만나면 인사하는 사람도 늘고 정월대보름에는 처음으로 주민들이 오곡밥을 지어 만나서 윷놀이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대책위원 활동을 하던 6명이 다시 모였다. 이들은 앞으로 마을발전위원회를 꾸려 활동하기로 했다. 주민들은 동네 현안인 쓰레기 무단투기를 없애는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양용규씨(78)는 “공무원이 나와서 하는 쓰레기 투기를 단속하는 것보다 우리처럼 가까이 사는 주민들이 나서면 동네가 깨끗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금천구 독산4동 27·28통 주민들이 지난달 25일 금천구청 회의실에 모여 ‘전봇대 사고’ 수습 과정에서 느낀 점과 앞으로 마을 문제 해결을 위해 할 일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전봇대 사고’ 이후 주민총회에서 대책위원회 위원들로 뽑혔으며 대책위는 해산하고, 마을발전위원회로 활동하기로 했다. 서울 금천구 제공

서울 금천구 독산4동 27·28통 주민들이 지난달 25일 금천구청 회의실에 모여 ‘전봇대 사고’ 수습 과정에서 느낀 점과 앞으로 마을 문제 해결을 위해 할 일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전봇대 사고’ 이후 주민총회에서 대책위원회 위원들로 뽑혔으며 대책위는 해산하고, 마을발전위원회로 활동하기로 했다. 서울 금천구 제공

‘전봇대 사고’ 이후 독산4동에선 다양한 ‘실험’이 시작됐다. 주민들은 피해보상금 2000만원을 나눠쓰지 않고 동주민센터에 기탁, 마을기금으로 조성키로 했다. 단발성 사업 예산으로 쓰지 않고, 지역 신협과 연계해 독산4동의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종잣돈으로 쓰기로 했다. 지난달 25일 마을공동체 전문가들이 모여 독산4동의 마을기금을 어떻게 활용할지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마을공동체가 행정 지원을 받지 않고 자립,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마을기금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현재 서울시 안에서도 마을기금이 조성된 사례는 드물다.

동주민센터와 주민들이 함께 ‘같이가게’(가칭) 사업도 시작한다. 이 골목길에서 26년간 슈퍼를 운영한 정영석씨(56)의 가게는 전봇대 사고 때 피해 접수를 받는 등 ‘작은 동주민센터’의 역할을 했다. 독산4동주민센터는 올 상반기 정씨의 가게에 회의용 테이블을 놓는 등 ‘같이가게’ 1호로 꾸며 주민들이 자치회의나 모임을 하는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슈퍼 입장에선 공간을 내주는 대신 가게를 새롭게 꾸미고 잠재적 손님도 확보할 수 있다. 황석연 독산4동 동장(49)은 “‘같이가게’는 골목 슈퍼도 살리면서 주민들이 만나는 공간도 확보하게 될 것”이라며 “독산4동 곳곳의 골목에 ‘같이가게’를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동주민센터는 초등학교 근처의 골목길을 ‘아이들의 전봇대 거리’로 꾸밀 계획이다. 전봇대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해 전봇대마다 아이들과 함께 공공미술을 입히고, 전봇대를 아이들이 관리하도록 하면서 주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낸다는 계획이다. 황 동장은 “주민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자발적인 움직임이 나왔다”며 “독산4동에서 ‘행복한 마을’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조만간 동주민센터 앞 마당에선 오후 6시 이후 ‘땡처리 공공마켓’도 열린다. 동네 슈퍼에서 당일 팔지 못한 상품을 가지고 나와 사고팔 수 있는 장터가 마련된다.

황 동장은 전국 첫 민간인 출신 동장으로 지난 1월 부임했다. 그는 서울혁신파크 운영위원장 출신으로 마을만들기에도 관심을 보여왔다. 황 동장은 “어둡고 낙후한 동네를 행복한 마을로 만드는 방법은 예전처럼 그 지역을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세우는 것은 아닐 것”이라면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독려하고 지지하는 관계망을 만들면 도시의 다양한 문제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 동장은 “독산4동은 ‘전봇대 사고’로 오히려 마을공동체가 싹텄다”며 “동주민센터는 ‘같이가게’, ‘땡처리 공공마켓’, ‘전봇대 거리’처럼 독산4동 주민들이 관계망을 만드는 기회와 공간을 지원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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