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 속 진실 가리기?…법정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2019.02.22 16:29 입력 2019.02.22 16:51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 기자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2011년 이란

2011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황금곰상을 수상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이 영화는 남녀 주연상까지 휩쓸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11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황금곰상을 수상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이 영화는 남녀 주연상까지 휩쓸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5년 붕괴한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길 건너 붉은 벽돌 건물이 사법연수원이었다. 사법시험 합격자가 늘면서 경기 고양시로 2002년 이전했다. 서초동 연수원 자리에는 파산을 담당하는 재판부가 들어갔다.

10여년 전 이 앞을 함께 지나던 판사가 말했다. “연수원이 여기 있을 때는 젊은 친구들 즐거워하는 소리가 항상 들렸어요. 지금은 돈 내놓으라는 사람들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고.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지요. 이 길로 가급적 안 다니게 되더라고요.” 서초동 사법연수원을 모르던 나는 오히려 ‘연수생들이 악에 받쳐 싸우는 사람들을 아침저녁으로 봤어야 좋은 법조인이 됐을 텐데, 아쉽다’고 생각했다.

이후로 줄곧 사법담당으로 있지만 좀처럼 좋은 기자가 되지 못했다. 나야말로 악에 받쳐 싸우는 사람들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대신 권위적이고 어설픈 판사 흉내를 냈다. 변호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엉터리 주장도 서슴지 않고, 당사자들은 거짓말로 억지를 쓴다고 여겼다.

그러다 어느 법조인 부부의 이혼 과정을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얘기가 판이하다고 했다. 엘리트 법조인인 두 사람의 기억이 이렇게 다르니, 다른 사건들은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사건 당사자들이 작심하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법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실 발견보다 갈등 해결이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됐다. 뒤늦게.

이혼을 선택하려는 부부, 별거 중에 가정부와 휘말리게 된 형사사건
시시비비를 따지는 남편, 어떤 식으로든 갈등을 풀려는 아내, 그리고 딸
편견과 다른 기억과 거짓말…진실게임의 끝에 기다리는 건 파국

‘사법의 목표는 갈등 해결’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를 뒤늦게 깨닫는다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는 이혼하는 부부가 나온다. 부인은 아이를 외국에서 교육하고 싶어 하지만 남편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두고는 가지 못한다고 한다. 부인 씨민은 이혼을 하고 떠나겠다며 법원을 찾아가지만 판사는 사유가 되지 않는다며 돌려보낸다. 그러자 씨민이 친정으로 가면서 별거가 시작된다. 남편 나데르는 아버지를 돌볼 가정부를 고용하는데, 가정부는 아버지 팔을 침대에 묶어두고 외출한다. 침대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은 아버지를 발견한 나데르는 무섭게 화를 내며 가정부를 내보낸다. 그런데 가정부가 유산하고, 이유를 치매노인의 아들이 자신을 넘어뜨려서라고 한다.

가정부 부부는 주인공 남편이 태아를 죽였다며 고소하고, 이에 남편도 가정부가 노인을 가두었다며 맞고소한다. 나데르 부부는 별거 중에 뜻밖의 형사사건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서로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서서히 확인한다. 씨민은 딸이 협박당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데르는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는 일을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지쳐 이혼하기로 한다. 영화 제목이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이 아니라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인 이유다. 이혼하는 부부에 관한 법률적 설명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어떻게 다룰지에 관한 영화다.

남편 나데르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사람이다. 씨민이 친정에 가고도 여느 때처럼 딸의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딸에게 페르시아어로 답하게 하고, 나데르가 영어 단어를 대다가 말한다. “그건 아랍어잖아.” “선생님이 그랬어.” “틀린 건 틀린 거야, 누가 뭐라고 하든.” “그러면 점수 깎일걸.” “괜찮아. 깎으라고 해.” 주유소에서 거스름을 받아오지 않은 딸에게 말한다. “잔돈은?” “안 주던데.” “달라고 했어?” “팁이잖아.” “기름을 넣어줘야 주는 거지, 받아와.” 딸은 울상이 되어 거스름을 받아오고, 나데르는 그 돈을 차에 기름을 넣은 딸에게 준다. 이때 딸의 뿌듯한 얼굴이 화면에 비치는데 자신을 교육하는 나데르에 대한 신뢰가 드러난다.

씨민은 하나하나 시비(是非)를 가리기보다 어떤 방법으로든 갈등을 해결하려 한다. 처음에 이혼하겠다며 법원으로 남편을 끌고 간 사람도 씨민이고, 친정으로 거처를 옮긴 사람도 씨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말한다. “그이는 붙잡지도, 이혼을 거부하지도 않아요. 지금껏 14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이혼법정에 가거나 친정으로 떠나는 일은 모두 갈등을 해결해보려는 나름의 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애매한 화법에 나데르는 반응하지 않는다. 외국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도 이미 설명했기에 씨민을 무작정 잡을 수도 없다. 그래서 씨민이 친정에 가져갈 짐을 다 싸놓고 “이 CD 가져갈게”라며 뜸을 들여도 “뭐든 다 가져가”라고 말한다.

[이범준의 법정&영화]진술 속 진실 가리기?…법정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논리적인 나데르는 법정에 빠르게 적응한다. 리걸마인드를 쉽게 체득하는 사람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은행원인 나데르는 태아를 죽이지 않았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판사가 수긍하도록 합리성을 만드는 것이다. 가정부를 내보내면서 밀기는 했지만 문이 열리는 방향은 올라가는 계단 쪽이라 아래층으로 쓰러지기 어렵다고 말하는 식이다. 나데르만큼 논리적이지 못한 가정부 부부는 분명히 밀려 넘어졌다고 호소할 뿐이다. 종종 신과 순교자에게 맹세도 해본다. 마침내 가정부의 남편이 “내 문제는 저 인간처럼 그럴싸한 말을 못하는 것뿐”이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분을 참지 못하고 판사에게 “신이 무서운 줄 알라”고 대들다가 감치 명령도 받는다.

나데르 나름의 논리력도 법률가의 세계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나데르와 가정부 부부는 판사를 앞에 두고 어떻게 임신부를 밀칠 수 있느냐고 말싸움을 벌인다. 그러다 나데르가 “임신부인지 몰랐고, 내가 알고 모르고는 논점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를 듣고 있던 판사가 “아니다. 중요하다. 알았다는 게 입증되면 3년까지 선고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것이 고의범과 과실범을 나누고, 인식 있는 과실과 미필적 고의까지 구분해 자신의 운명을 바꾼다는 사실을 나데르는 알 수 없었다.

나데르에게 유리하게 보이던 재판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더구나 나데르는 가정부 부부에게 “임신부가 이런 일을 할 줄 몰랐다”는 논리를 내세웠다가, 상대를 무시한다는 나쁜 인상도 판사에게 남겼다.

나데르가 가정부의 임신을 알고 있었음을 알아낸 것은 그가 교육한 논리적인 딸이다. 가정교사가 가정부에게 산부인과 의사를 소개하며 전화번호를 준 일이 있었다. 가정교사는 나데르는 산부인과 얘기를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판사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재판을 벌이는 동안 나데르가 가정교사에게 산부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태아의 상태가 이미 안 좋았던 것 아닌지 확인해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딸이 나데르에게 묻는다. “선생님이랑 아줌마 얘기 못 들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줌마한테 전화번호 준 것은 어떻게 알아.”

결국 나데르는 임신을 알았다고 실토한다. 가정교사도 나데르가 자신과 가정부 대화를 못 들었을 것이라고 했던 증언을 취소한다.

판사에게 불려간 딸이 아빠는 몰랐다고 거짓말한다. 거짓말을 했다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는 딸을 보면서 나데르는 가정부 부부와 합의키로 한다. 나데르는 합의금을 주면서 내가 밀어 태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쿠란에 맹세해달라고 한다. 그런데 가정부는 맹세하지 못한다. 사실은 유산 전날 맨발로 집 밖을 나간 나데르 아버지를 찾다가 차에 부딪쳤고, 그때 아이가 죽은 것 같다고 자신의 남편에게 고백한다. 이렇게 해서 관객에게 모든 진실이 드러나지만 영화 속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져 있다. 나데르에 대한 딸의 존경은 사라졌고 씨민도 그런 나데르와 살 이유가 없다. 두 사람은 이혼하고 딸은 부모 가운데 누구와 살지를 결정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많은 사람이 오가는 법원 복도를 오랫동안 보여준다. 악을 쓰며 싸우는 소리, 놀라서 우는 아이 소리, 무심한 듯 지나가는 발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조금씩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사법기자임을 이용해 판사실을 들락거리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법 이론을 들먹여왔다. 얄팍한 법 지식을 익혀 판결을 해석하고 비판했을 뿐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갈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고백건대 나는 시끄러운 법원 복도가 처음부터 달갑지 않았다. 그런 내게 보이는 영화 속 법원 복도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주었다.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사법의 목표이며, 갈등을 해결하는 곳이어야 법원이다.이 단순한 진리를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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