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들 ‘침묵’ 역이용한 임종헌 “재판개입 없었다”

2019.04.01 06:00 입력 2019.04.01 11:23 수정

사법지원 vs 재판권침해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②] 법관들 ‘침묵’ 역이용한 임종헌 “재판개입 없었다”

“법관은 공평무사하고 청렴하여야 하며, 공정성과 청렴성을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아니한다.” 대법원 규칙인 법관윤리강령 제3조 1항은 이렇게 규정돼 있다. 법관은 스스로 공정하고 청렴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관점에서 봐도 그래야 한다는 이른바 ‘외관의 공정성’까지 강조한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가 차성안 판사의 언론 기고와 판사들 커뮤니티인 이판사판 야단법석을 압박하기 위해 검토했던 부분도 바로 이 조항이다. 일선 법관들이 법정 바깥에서 사회·정치적 의견 표명을 하는 게 ‘외관의 공정성’을 훼손하는지 따져본 것이다.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인 ‘재판 개입’은 어떨까. 법관윤리강령에도 불구하고 법원 내에선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절반은 틀린 이야기다. “재판 개입을 인정하는 법관은 없을 겁니다. 자신의 판결에 법원행정처 문건이 영향을 줬다고 인정하는 순간 법관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하니까요.” 한 법조인은 말했다.

문제는 형사적 책임을 물을 때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60·사진)은 최근 자신의 형사재판에서 이 같은 법관들의 ‘침묵’을 역이용하고 있다.

■법관들 “재판에 영향 안 받았다”

임, ‘법원행정처 문건 영향 없었다’는 다른 법관들 진술 읊어
‘의견 검토는 법관의 책무…행정처 문건도 예외 아니다’ 주장
검찰 “임의적 결론 정해 전달…특정 방향으로 재판하게 종용”

지난 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임 전 차장은 현직 대법관인 이동원·노정희 대법관의 검찰 진술 내용을 언급했다. 이 대법관은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노 대법관은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행정소송 항소심 재판장이었다. 헌법재판소가 통진당 해산 및 의원직 상실을 결정하자 통진당 국회의원과 지방의회의원들이 행정소송을 냈고, 법원이 이를 직접 판단함으로써 헌재와의 법적 권위 경쟁에서 앞서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가장 중요한 참고인이 직접 이 사건을 재판한 이동원 대법관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이 대법관께서는 이민걸(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로부터 ‘국회의원 지위 상실 여부에 대한 판단 권한이 법원에 없다는 게 이상하지 않으냐’는 말과 함께 문건을 받고 잘 검토하겠다고 답변한 것으로 기억한다, 전혀 심적 부담감이 없었는데 평소 친한 사이고 그러한 의견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압력을 받았다면 감추려고 했을 텐데 (이 대법관이) 스스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판결로 삼고 있고요. 이걸 어떻게 직권남용죄로 의율할 수 있는지 검찰에 묻고 싶습니다.”(임 전 차장)

이 대법관은 해당 사건이 적시처리가 필요한 중요사건으로 지정돼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심리한 것이지 이 전 기조실장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고, 판결문을 작성할 때도 문건을 참고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임 전 차장은 이어 말했다. 노 대법관도 마찬가지다. “노 대법관님도 자기는 이민걸과 통화한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이민걸의 말에 영향을 받은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의) 통화 내용으로 인해 심적 부담을 느낀 건 전혀 없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임 전 차장)

임 전 차장은 법원행정처 요청에 거부감이 없었다는 다른 법관들 진술도 줄줄 읊었다. 법원행정처 연락을 받은 당사자들이 괜찮다는데 왜 검찰이 나서느냐는 식이다. 다양한 의견을 검토하는 것은 법관의 당연한 책무이며, 법원행정처 문건이라고 예외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22년 전 자신의 경험을 소개할 때는 핏대까지 세웠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개인파산 사건이 쇄도하자 당시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이던 임 전 차장이 7일간 밤을 새워 법리 검토 자료를 만들어 일선 재판부에 배포했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어떻게 일선 법원에 대한 재판 개입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임 전 차장)

검찰은 임 전 차장에 대해 “억지 주장”이라고 반격했다. ‘사법지원행위’와 ‘재판권 침해행위’는 명백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공개된 논의나 판례 등을 법관에게 제공해 정확한 재판을 돕는 것은 지원이지만, 임의적으로 결론을 정해 전달함으로써 특정 방향으로 재판하도록 종용하는 것은 재판권 침해행위입니다.”(검사)

검찰은 통진당 사건의 주요 쟁점이 법원의 위상과 관련돼 있어 개입 문건을 만들었기에, 단순한 법리 검토 자료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한 검사는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행정처 요청과 달리) 각하 판결하자 법관들에 대한 부정적 인사평정이 이뤄졌고, 주심 판사가 편향됐다고 공개 비판한 사실도 확인했다”며 “결론의 개방성을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재판지원이라는 (임 전 차장) 주장은 허구”라고 말했다.

재판 개입의 대상이 된 법관 모두가 이·노 대법관처럼 진술한 것은 아니다. 한 법관은 검찰 조사에서 “법원행정처 요청을 받은 이상 재판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법원행정처의 검토 의견이 맞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달리 판단하는 데 부담이 있어 따르게 됐다”는 다른 법관 진술도 있다.

■“국회의원 개인적 친분으로 도와”

임, 홍일표 의원 사건엔 “해당 재판부에 전화…압박은 안 해”
상고법원 입법 대가 부정하며 “음모론 기한 의혹 제기 불과”

지난 26일 재판에서는 자유한국당 홍일표 의원 사건을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임 전 차장이 법원행정처 심의관에게 사건을 검토하도록 하고, 담당 재판부에 ‘잘 봐달라’고 요청한 혐의였다.

“피고인(임 전 차장) 측은 검토 보고서 내용이 소송 일방 당사자(홍 의원)에게 유리한 소송 정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저희가 살펴본 결과 검토 보고서에는 향후 쟁점과 전망에 대한 사법지원실 심의관의 의견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파편화된 주장입니다.”(검사)

“홍일표 의원님과는 제가 홍 의원님 법원 재직 시절부터 친한 관계였고 가끔 지인들 사이에 모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판사의 본분을 망각했다는 도덕적인 비난은 감수할 수 있지만 이게 과연 직권남용죄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재판부의 신중한 판단을 부탁드리겠습니다.”(임 전 차장)

홍 의원은 양승태 대법원의 역점 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안을 대표발의했다. 그러나 임 전 차장은 상고법원 도입에 도움을 받기 위해 홍 의원 사건을 검토해준 게 아니고, 내용도 재판에 중요한 게 아니었다며 무죄라고 주장했다. 또 자신이 해당 재판부에 전화를 하긴 했지만 압박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홍 의원이 조사받은 사건을 검토시킨 혐의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양형을 검토시킨 것일 뿐, 방어 방법까지 검토시켰는지는 기억에 없다”는 게 임 전 차장 입장이다.

홍 의원도 검찰 조사에서 항소심 재판 절차가 너무 지연된다고 불만을 표했더니 임 전 차장이 절차 진행 상황을 한번 알아봐주겠다고 해 사건번호 등을 알려줬지만,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는 말만 들었지 특별히 항소심 재판에 유용한 내용을 전달받은 것은 없다고 진술했다. 또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기탄없이 물어본 것이고 상고법원 입법의 대가로 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임 전 차장은 “음모론에 기한 의혹 제기에 불과하다”고 했다.

임 전 차장의 계속되는 주장에 검찰은 28일 재판 때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 심의관으로 있으면서 헌재소장을 비난하는 내용의 법률신문 대필기사를 작성한 문성호 판사의 진술 내용을 일부 공개했다.

“문 판사는 피고인(임 전 차장)에게 대필기사를 쓰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으냐고 어필했지만 피고인이 역정을 내서 어쩔 수 없이 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쭤봤습니다. 한번 거절 의사를 표현했으면 계속 안 쓴다고 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그때 문 판사가 언급한 게 ‘KKSS’였습니다. ‘까라면 까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의미로 피고인이 기조실장으로 있을 때 만든 폭탄사(폭탄주 건배사)라고 합니다. 법원행정처는 관료적인 분위기여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검사)

법원 내 관료화 문제는 사법농단 사건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니다.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방법원장으로 있으면서 촛불집회 관련 재판을 특정 재판부에 몰아 배당했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이후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가 만들어져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인한 재판권 침해를 논의했다. 검찰은 “당시 일선 법관들은 특정 사건에 대한 결론을 내려달라는 식의 직접적인 요구가 아니더라도 조언이나 암시, 권유 등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 사실상 특정한 방법을 유도하는 행위를 직무감독권에서 벗어난 행위로 봤다”고 했다. 법관윤리강령이든 신 전 대법관 사태 이후 만든 방안이든, 기준은 있지만 임 전 차장은 사법농단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홍 의원의 개인적인 사건을 심의관에게 검토시킨 게, 재판장에게 별도로 연락을 취한 게 잘됐다는 것인가요? 앞으로 그런 행위가 계속 허용돼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검사가 물었다. 매번 열을 올리며 검찰을 공격하던 임 전 차장은 이 질문에는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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