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첫 유죄 “재판 사무의 공정성에 의심을 일으킬 중대 범죄”

2021.03.23 21:15 입력 2021.03.24 10:18 수정

(왼쪽사진)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3일 오후 1심 선고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2019년 8월22일 2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경향신문 자료사진 lightroad@kyunghyang.com

(왼쪽사진)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3일 오후 1심 선고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2019년 8월22일 2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경향신문 자료사진 lightroad@kyunghyang.com

‘재판 개입=직권남용’ 첫 판결
법원행정처 관련자들의 지시
판사들은 ‘대법원장 뜻’ 이해
일선 법관 무죄 때와 다른 판결

개인적 이득 추구 위한 것 아닌
‘조직 구조 따른 것’ 양형 참작

양승태 대법원장 재직 시 법원행정처 관련자들에 대한 1심 재판부의 유죄 판결은 사법행정권자의 재판개입을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본 첫 사례이다. ‘재판 사무의 지원’이라는 사법행정권 본래의 권한을 남용해 다른 법관들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혐의가 인정됐다. 그동안 무죄가 선고된 사법농단 관련자들이 주로 재판 정보를 수집해 보고한 일선 법관들이었던 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재판장 윤종섭)는 23일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재판에 개입한 혐의 등을 받은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 대해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 대해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통합진보당 행정소송과 관련해 공무상 비밀누설과 직권남용 혐의를 받은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현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와 심상철 전 서울고등법원장(현 수원지법 성남지원 원로법관)은 무죄가 선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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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가 선고된 이 전 실장과 이 전 위원은 모두 30년 가까이 판사로 일한 엘리트 법관들이다. 이 전 실장은 2015년 8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법원행정처 소속으로, 이 전 위원은 2015년 2월부터 2017년 4월까지 대법원 양형위원회 소속으로 사법행정을 담당했다. 이들은 양 전 대법원장,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의 지시를 받아 일선 법원에 전달하고 다시 상부에 보고하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이 일선 법원에 전하는 지시와 권고는 인사권을 행사하는 대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의 의지로 이해됐고, 다른 법관들이 의무에 없는 부당한 일을 하게 하는 근거가 됐다.

이 전 실장에 대해선 제20대 총선 당시 국민의당 박선숙·김수민 의원이 홍보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의혹으로 재판을 받게 되자 해당 법원 공보판사에게 재판부의 심증을 사전에 확인하도록 지시한 혐의, 법원 내 연구회의 중복가입 해소조치를 시행하도록 해 법원행정처가 추진하던 상고법원 도입 등 사법행정 과제에 반대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하려 한 혐의가 일부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재판 사무의 공정성에 의심을 일으킬 중대한 범행”이라고 밝혔다. 이 전 위원은 헌법재판소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헌재 파견 법관을 통해 내부 정보를 수집하거나 위헌정당심판 이후 이어진 통진당의 각종 행정소송에 개입하고,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결정 사건 관련 재판에 개입한 혐의, 국제인권법연구회을 와해하려 했다는 혐의가 일부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헌재 파견 판사로 하여금 헌재 정보를 전달하게 했고, 사법정책 심의관 등으로 하여금 법원행정처의 권고에 따른 보고서를 3번이나 작성해 보고하게 하고, 위법 부당한 법원행정처의 결정을 전달해 재판권 행사를 방해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전 위원의 직권남용이 인정됐지만, 권리행사방해는 이뤄지지 않았다며 일부 범죄사실을 무죄로 판단했다. 직권남용죄는 직권을 남용할 것과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것을 구성요건으로 한다. 피고인들이 선고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통진당 사건 재판부에 법원행정처의 의중을 전달했는데, 실제 판결이 달리 이뤄진 경우에는 권리행사의 방해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두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이들의 행동이 개인적 이득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법행정 조직의 계통 구조에서 지시를 받아 한 일이었다는 점을 양형에 참작했다고 했다. 이날 판결 선고는 간략한 판결 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다양한 법리와 세밀한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을 설명하느라 3시간40분가량 소요됐다. 무죄가 선고된 방 부장판사는 자신에게 적용된 공무상 비밀누설과 직권남용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재판장의 발언이 나오자 크게 숨을 쉰 뒤 심 전 법원장에게 웃으며 인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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