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의 눈물

설 자리 줄어든 연구자·강사는 고용 불안… 설 자리 늘어난 전임교수는 연구 위축

2014.10.27 22:06 입력 2014.10.27 22:16 수정

(4) 벼랑 끝에 몰린 ‘인문학’

젊은 인문학도들 불안한 미래로 ‘인문학의 길’ 고민

사회 전반의 ‘인문계열’ 기피 현상이 심화되면서 인문학 연구자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대학의 인문계열 학과 통폐합과 정원 축소는 고용불안에 떠는 비정규직 인문학 연구자를 대거 양산하고 있다. 인문학 연구자들은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마지못해 매달리면서 정작 자신만의 연구는 하지 못하는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대학에서 인문학 강의가 축소돼 전임교수의 강의 담당률이 높아지면서 석·박사급 시간강사는 강단에서 밀려나고 있는 반면 전임교수들은 늘어난 강의 시간에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불안한 미래로 인해 인문학을 계속 공부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젊은 인문학도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연구와 교육, 후속 학문세대 양성이라는, 인문학이 존속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토대가 통째로 침식되고 있다. ‘인문학과’의 위기가 ‘인문학’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문과의 눈물]설 자리 줄어든 연구자·강사는 고용 불안… 설 자리 늘어난 전임교수는 연구 위축

■ “논문 쓰는 기계가 된 느낌이에요”

서울에 있는 대학 연구소의 HK(Humanities Korea·인문한국) 연구교수 7년차인 ㄱ씨(45·여)는 자신을 ‘논문 쓰는 기계’에 비유했다. HK 사업은 각 대학 인문학 연구소 내에 전임교수 제도를 도입해 인문학 박사들의 고용불안을 해소하고, 연구소 중심의 인문학 연구체계를 세우기 위해 도입됐다. 한국연구재단이 연구교수들의 급여를 지급한다.

연구교수의 계약은 1년 단위로 갱신된다. 계약을 갱신하려면 연구소와 대학이 원하는 연구는 물론 자기만의 연구 성과도 내야 한다. ㄱ씨의 전공은 ‘사회변동 분석’이다. 50년, 100년간 진행된 사회변동을 분석하고, 충분한 자료를 모아 긴 호흡의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연구소와 대학이 원하는 연구에 매달리다 보면 자기만의 연구를 하기 힘들다. ㄱ씨의 월 급여(실수령액)는 225만원이다. 생계를 유지하기도 버거운 액수다. 그래서 ㄱ씨는 강의(최대 6학점)에 매달린다. ‘연구소 일’ ‘강의’ ‘개인 연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HK 연구교수는 10년간 계약을 갱신하면 HK교수 자격이 주어진다. ㄱ씨는 앞으로 3년을 더 채우면 HK교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HK교수 자격을 얻는다 해도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 따라 곧바로 채용하기도 하고, 다시 공개채용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공개채용에서 떨어지면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한다. ㄱ씨 주변에는 15년간 연구교수를 한 선배도 있다.

ㄱ씨는 대학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현재 정부출연기관 연구원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다. ㄱ씨는 “개인연구자 또는 자유저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중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다. 연구소 안에서는 성실한 척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문과의 눈물]설 자리 줄어든 연구자·강사는 고용 불안… 설 자리 늘어난 전임교수는 연구 위축

■ 최대 피해자는 30대 석·박사급 연구원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ㄴ씨(32)는 ‘박사후 연구원’이다. 얼마 전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연구에 뛰어든 학계의 ‘새싹’이다. 소속 대학이 교육부의 ‘BK(Brain Korea·두뇌한국)21+’ 사업에 선정돼 1년3개월간 일하기로 계약을 맺고 매달 200만원 안팎을 받는다. ‘BK21 사업’은 세계 수준의 대학원과 지역 우수대학을 육성할 목적으로 교육부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다.

ㄴ씨는 “프로젝트 계약이 끝나면 시간강사가 되는 게 두렵다”고 말했다. 시간강사는 4대 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방학 때 급여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박사과정을 마친 친구가 한 학기에 7개 강의(21학점)를 맡는다고 하길래 떼돈 벌겠다고 놀렸는데 알고 보니 1년간 2000만원 벌었더라”고 했다.

ㄴ씨와 같은 30대 인문학 연구자들은 대학 인문계열 구조조정의 ‘최대 피해자’이다. 인문계열 학과 수가 줄어 학생 수가 감소하면 강좌 수도 적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석·박사급 연구자들이 학생을 가르칠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ㄴ씨는 “비판 정신이 기본인 인문학자들은 대학 인문계열 구조조정에 대한 발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ㄴ씨는 지난해 8월 대학 밖에서 인문학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수유 너머’ ‘다중지성의 정원’ 등 인문학 공동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대학원생 80여명이 주축이 돼 ‘앎과 삶의 일치’를 모토로 협동조합을 결성한 것이다. ㄴ씨는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이 아닌, 삶 안에서 숨쉬는 글을 쓰고 싶다”며 “문화재단·도서관 등과 강좌를 함께 기획하고, 출판사와도 협력해 책을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 기존 연구 재탕하는 교수들

대학 정교수들도 고민은 깊다. 교육부 지침에 따라 전임교수 강의 담당률을 높이려다 보니 강의가 늘었고, 과목이 많아지니 강의에 충실할 수 없는 구조다.

ㄷ교수(60)는 “인문학의 경우 소규모의 세미나식 강의가 이뤄져야 하는데 강의 수는 줄고 대형 강의는 늘어나면서 오히려 강의의 질이 낮아지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일부 대학에서는 교수들이 자기 전공이 아닌데 강의를 맡아야 하는 일도 생겼다. 서양사 전공이지만 동양사를 가르치거나 고대사 전공인데 현대사까지 가르치는 식이다. 전임교수 강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시간강사들은 강의 기회를 잃게 됐다. ㄷ교수는 “의도하지 않게 시간강사 일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며 씁쓸해 했다.

교수들의 강의 시간은 늘어났지만 연구를 평가하는 지표 수는 되레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교수들은 새로운 연구 실적을 내놓기보다는 기존 연구를 재탕하거나 하나의 연구 성과물을 여러 개로 쪼개 실적을 채우는 데 급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ㄷ교수는 “젊은 교수들은 연구 실적을 쌓아야 하는 데다 대학이 구성하는 위원회나 태스크포스(TF)에도 참여해야 한다”면서 “교수들이 연구와 강의에 전념하기 어려운 형국”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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