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는 얼마나 공정한가(하)

“오만한 엘리트와 저항 않는 패자를 만든 능력주의…사회를 때려부수는 폭군이다”

2021.11.10 06:00
이하늬 기자

사걱세·이탄희 의원실·경향신문 주최 ‘능력주의를 넘어서’ 포럼

김누리 중앙대 교수가 9일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청어람홀에서 열린 ‘2022 새로운 대한민국을 상상한다; 능력주의를 넘어서’ 토론회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김누리 중앙대 교수가 9일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청어람홀에서 열린 ‘2022 새로운 대한민국을 상상한다; 능력주의를 넘어서’ 토론회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개인 노력보다 운에 따른 ‘능력’
넘을 수 없는 계층 장벽 만들고
약자들은 역량 키우기를 포기

영·유아기에 생성된 인적자본
평생에 걸쳐 격차를 만들어
아동 교육 격차 해소 집중해야

“능력주의는 한 사회를 다 때려부수는 폭군이다. 능력주의는 ‘나의 불행은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못남에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도록 길들였다.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일수록 존경받는 게 아니라 패배자의 징표로 읽힌다. 우리는 더 이상 능력주의로 교육을 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경쟁교육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한국 교육이 이제는 변해야 한다.”

김누리 중앙대 독어독문과 교수는 9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경향신문 공동주최로 열린 ‘2022 새로운 대한민국을 상상한다: 능력주의를 넘어서’ 포럼 기조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능력주의가 실제로는 사회의 공공선, 노동의 존엄성, 사회구성원들의 자기정체성을 망가뜨린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 사회의 지난 100년간의 교육을 일제강점기 30년, 민간·군부독재 40년, 민주정부 30년으로 분류했다. 시기마다 교육이 추구한 목표는 황국신민→반공투사→인적자원으로 달라졌지만, 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능력주의’ 기조는 지난 100년 동안 일관되게 유지됐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그 결과 오만한 엘리트와 저항하지 않는 패자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엘리트들은 ‘내가 잘해서’ 성공했다고 여기고 패자들은 ‘내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절망사’(death of dispair)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죽음의 표면적인 이유는 약물·술·자살 등으로 다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절망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개인만 파괴하지 않는다. ‘불평등으로 치환된 능력주의의 현주소’ 발제자로 나선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발전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로 공정을 꼽았다. 공정은 그 자체로 중요한 목적이지만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 교수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을 정도로 계층 장벽이 높은 사회에서 약자들은 자신의 역량을 키우려는 노력을 포기하며, 다수가 참여할 수 없는 특권층만의 기득권 생태 속에서는 혁신이 일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처럼 국토가 작고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는 인적자원이 더욱 중요하다.

문제는 이 능력이 개인의 노력보다는 ‘운’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교수는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인의 노력이 아닌 태어난 국가, 유전자, 양육환경 등이라며 “인생 성취의 팔할이 운이라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라고 했다.

‘능력주의의 산실이 된 시험과 학교’ 발제자로 나선 장근영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을 ‘시험제도가 내면화된 사회’라고 규정했다. 인생의 중요한 길목마다 시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할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시험이 세상의 원리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시험을 통해서만 자격이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합격자 대 불합격자’ 구도로 끝나지 않는다고 장 연구위원은 지적했다. ‘명문대 대 지잡대’ ‘정규직 대 비정규직’의 경계선이 그어지고, 이 경계선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시험이 내면화된 사회에서는 이 같은 구도가 사회정의 이전에 개인 정체성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은 능력주의로 정당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현철 교수는 영·유아기에 만들어진 인적자본이 평생에 걸쳐 지속된다는 점을 언급하며 “많은 경제학 연구에 따르면 5세 미만 아동에 집중해야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다”며 영·유아 교육에 대한 격차 해소를 강조했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국장은 대학서열 해소, 출신학교 차별금지법 제정, 지역인재 의무채용법 도입, 임금불평등 개선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교육의 영역과 더불어 학력·학벌과 무관하게 안정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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