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은 논쟁에도 끝나지 않은···‘역사교과서 전쟁’의 역사

2022.09.09 16:28 입력 2022.09.09 18:20 수정

일러스트|김상민 기자

일러스트|김상민 기자

“냉전 체제가 정치 세력의 갈등과 재편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탐색한다.”
“6·25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 과정을 국내외의 정세 변화와 연관 지어 이해한다.”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사회의 성장과 다원화된 민주주의의 양상을 탐구한다.”

- (2022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한국사 공통 교육과정 시안 중)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들은 각각 거대한 불씨를 안고 있다. 첫 문장에는 1948년의 사건을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영이 항의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았지만, 보수진영 일부는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본다.

두 번째 문장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이라고 풀어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의 남침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고 교육과정에 ‘남침’이라는 단어가 없다 하더라도 학교에서 6·25를 북침이라고 가르칠 리가 없지만, 그런데도 교육과정부터 ‘남침’을 명기하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세 번째 문장에서는 ‘민주주의’가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고 써야 한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힘을 얻어왔다.

여기에 나열된 문제들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20여년 동안 계속된 역사교과서 용어전쟁이 재연될 기미를 보인다. ‘친북반미 교과서’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까지, 학생들에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는 문제는 오랜 논란이었고 그 시간만큼 정치적으로 오염돼 소모되기도 했다.

뉴라이트가 쏘아 올린 교과서 ‘역사전쟁’

‘교과서 전쟁’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때는 2004년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한국근현대사를 배우는 고등학교 절반이 채택한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반미·반재벌’ 관점을 담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현대 한국 경제성장과 재벌체제의 부정적 측면, 독재의 그늘 등을 담았다는 이유다.

국사교과서는 1974년 국정화된 이래 쭉 유지되다가 7차 교육과정부터 검정체제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선택과목 중 하나인 한국근현대사 과목이 시작이었다. 검정교과서는 과거 국정교과서가 다루지 않거나 못했던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 유신체제의 그늘 등을 본격적으로 다뤘다. 이런 현대사 교육을 못마땅해한 뉴라이트 계열이 검정교과서 중 가장 진보적 서술을 한 교과서를 지목해 문제로 삼은 것이라고 역사학계는 본다.

교과서포럼 발간 한국근현대사 대안교과서.

교과서포럼 발간 한국근현대사 대안교과서.

당시 부상하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2005년 초 ‘교과서포럼’을 결성하고 근현대사 교과서 개정 운동을 시작했다. 2008년에는 식민지근대화론과 이승만 국부론, 박정희 경제성장 주역론 등을 담은 ‘대안교과서’를 펴내기도 했다. 대안교과서의 근현대사 해석은 기존 학계의 역사인식과 상당히 달랐지만 이들은 기존 서술이 좌파적이라고 비판했다.

‘자유민주주의’ 용어 교과서에 밀어 넣은 MB 정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런 역사관은 제도권 교과서로 진출했다. 교과서 용어전쟁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는 개발 연구진도 모르게 ‘2009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했다. 연구진은 반발하고 무더기로 사퇴했다. 당시 정부에 용어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낸 단체는 바로 교과서 포럼 출신들이 결성한 한국현대사학회였다.

‘자유민주주의’는 1972년 유신헌법에 처음 등장해 주로 반공주의 색채가 가미된 용어, 공산주의와 대비해 이승만·박정희 체제를 옹호하는 용어로 쓰였다. 현행 헌법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있을 뿐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4·19 민주화운동,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서술하는 단어도 ‘민주화’지 ‘자유민주화’가 아니었다.

반면 보수진영에서는 민주주의에는 ‘인민민주주의’도 포함되는 만큼 ‘자유민주주의’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명박 정부 이전까지 역사교과서에 잘 쓰이지 않던 이 단어는 10년이 훌쩍 넘게 지난 현재도 역사교과서 이념 논란의 핵심이 있다.

외면당한 교학사 교과서, 실패한 국정교과서

박근혜 정부는 정권의 역사 해석을 제도화하는 데 더욱 집중했다. 2013년에는 한국현대사학회 소속 학자들이 집필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해 제도권으로 진입했다. 이른바 ‘교학사 교과서’ 사태의 시작이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를 축소 왜곡하거나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미화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사실관계 오류는 다른 검정교과서의 두 배 수준이었고 위키피디아 등을 표절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집필진과 여당, 정부는 ‘좌파세력의 공격’이라고 치부했지만, 교과서 채택률이 0%대에 그치며 사실상 사장됐다. 이 과정에서 교육부가 교학사 교과서를 선정했다가 다른 교과서로 바꾼 고등학교들을 대상으로 특별조사를 하는 등 ‘외압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현장에서 뉴라이트 검정교과서를 받아들이지 않자 박근혜 정권은 직접 통일된 역사교과서를 제작해 각급 학교에 배포하는 ‘국정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정부가 통일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다. 역사교과서를 국정 체제로 발행하는 나라는 러시아와 이란, 북한, 베트남 등 권위주의 체제의 그림자가 짙게 남은 극소수 국가밖에 없다.

2016년 11월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6년 11월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6년 11월 ‘국정화교과서반대 청소년행동’ 주최로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집회에서 청소년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6년 11월 ‘국정화교과서반대 청소년행동’ 주최로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집회에서 청소년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년여에 걸친 논란 끝에 정부는 2015년 10월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2017년부터 국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은 잊힌 유행어가 된 ‘혼이 비정상’ 발언은 여기서 나왔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11월 국무회의에서 “잘못된 역사를 배우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거나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역사학계와 교육현장, 여론까지 모조리 부정적이었지만 정부는 찬성 여론을 조작하고 홍보비 26억원을 쓰며 국정교과서 발행을 강행했다. 교과서 내용을 가늠해볼 수 있는 편찬기준과 집필진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정교과서는 결국 박근혜 정권 몰락을 부채질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뒤 공식 폐지되며 학교 현장에 적용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자유민주주의’ ‘남침’ ‘건국’.. 교과서 용어전쟁 언제까지

현장에서 선택받지 못한 뉴라이트 교과서, 정권 몰락의 실마리가 된 국정교과서 사태는 지났지만 교과서 ‘용어전쟁’은 그 후에도 진행 중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18년 교육부는 ‘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용어를 사용하는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발표했다가 보수진영이 반발하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용어도 혼용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놨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용어전쟁은 또 불거질 조짐을 보인다. 교육부가 최근 공개한 2022 개정 한국사 교육과정 시안에 ‘자유민주주의’ 대신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썼고, 6·25 전쟁을 서술하면서 ‘남침’이라는 단어를 빠뜨렸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교육부는 교육과정을 단순하게 서술하는 과정에서 남침 등의 단어가 빠진 것뿐이라면서도 해당 용어들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가 보수진영의 이념공세에 밀렸다는 비판도 나온다. 앞으로 교육부가 실제로 교육과정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연구진과 역사학계 등이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