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정치’가 아르헨티나 복지를 망쳤다

2011.05.23 21:57 입력 2011.05.23 22:07 수정

표 던진 지지층만 복지비 확대… 포퓰리즘 결합된 ‘시혜’로 전락

아르헨티나의 복지는 시혜적이고 선별적인 성격이 있다. 가난한 유권자에게 정부가 ‘쌈짓돈’처럼 복지혜택을 주는 문화다. 이는 결국 정부가 나라 곳간을 바탕으로 지지를 사는 행위로, 민주주의를 취약하게 만든다. 앞으로 국가복지를 강화해야 할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땅딸막한 체구의 카를로스 베니테스(63)는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뒤 체 게바라의 벽화 등으로 꾸며진 학교의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지난달 14일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로마 데 사모라시에서 만난 그는 한 ‘피케테로’(실업자운동 조직)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지난 1월부터 하루에 6시간씩 청소, 경비 업무 등을 하고 있다. 24년 동안 일했던 코카콜라 공장에서 1994년에 퇴직한 뒤 미장일 등을 했다는 그는 이 학교에서 일한 대가로 정부로부터 매달 1300페소(약 34만원)를 받는다. 그는 “월급보다는 보조금에 가까운 돈이지만 혼자 살고 있으니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베니테스는 정부가 실업자에게 상·하수도 청소, 공공주택 건설 같은 공공근로 일자리와 급여를 주는 사회프로그램인 아르헨티나 트라바하(Argentina Trabaja)의 수급자다. 이 제도는 2001년 경제위기 무렵 크게 늘어난 실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가 만든 ‘응급처치’다. 최근 중국 붐으로 콩 수출 등이 늘면서 아르헨티나 경기가 살아났다지만 수급자는 여전히 적지 않다. 이 프로그램의 정점이던 2003년 수령자는 220만가구,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0.9%에 달했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주택가의 길 위에서 젊은 노숙자가 이불을 덮은 채 낮잠을 자고 있다. 지중해재단(IERAL)의 조사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아르헨티나 18~24세의 실업률은 19%에 달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김지환 기자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주택가의 길 위에서 젊은 노숙자가 이불을 덮은 채 낮잠을 자고 있다. 지중해재단(IERAL)의 조사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아르헨티나 18~24세의 실업률은 19%에 달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김지환 기자

[복지국가를 말한다]‘선물의 정치’가 아르헨티나 복지를 망쳤다

[복지국가를 말한다]‘선물의 정치’가 아르헨티나 복지를 망쳤다

예로 카를로스 메넴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 모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사회프로그램을 이용했다. 96년 메넴은 정부에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실업자들의 거리시위인 피케테로 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한 ‘당근’으로 공공근로와 같은 사회프로그램을 시행했다. 2003년 집권한 키르치네르 정권은 여기에다 추가로 소기업 창업지원금 등을 개설, 실업자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 했다. 정부가 가진 ‘부’를 법과 제도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권 정의당(PJ)의 지지자로 줄을 서면 나눠주는 식이다.

피케테로 단체인 ‘연금자와 실업자를 위한 독립운동’(MIJD)의 니나 펠로소 공동대표(49)는 “사회프로그램에 따른 보조금 등의 분배도 수급자 리스트에 따라 이뤄지는 게 아니라 자기편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펠로소 대표는 또 “정부를 지원하는 피케테로 단체의 지도자가 실업자를 지원하는 사회프로그램의 운영권과 예산까지 같이 얻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02년 말에는 피케테로 조직이 20만개(전체의 10%) 이상의 보조금 프로그램을 통제했다.

이런 ‘우리가 남인가’식의 끼리끼리 복지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정부는 직접 투명하게 관리하는 복지제도를 확대하고 있다.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된 노동자를 일컫는 ‘네그로’(비공식 부문 종사자)와 실직자의 가정에는 자산심사를 통해 18세 미만의 자녀 1명당 220페소(5만8000원)의 자녀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또 2009년부터 국민연금에 기여금을 내지 않은 이들(여성 60세, 남성 65세 이상)도 최저연금인 1272페소(33만5000원)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 청년이 지난달 15일 부에노스아이레스 한인촌 근처 거리에서 부잣집 개들을 산책시키고 있다. 일자리가 귀한 아르헨티나에서는 개 산책 아르바이트를 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김지환 기자

한 청년이 지난달 15일 부에노스아이레스 한인촌 근처 거리에서 부잣집 개들을 산책시키고 있다. 일자리가 귀한 아르헨티나에서는 개 산책 아르바이트를 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김지환 기자

아르헨티나의 사회정책을 기획·조정하는 국가사회정책조정위원회의 후안 카를로스 나달리치 총괄기획국장은 “키르치네르 정권 이전에는 사회복지 정책에 ‘선물의 정치’ 같은 성격이 있었다”면서 “2004년 이후에는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은행 카드를 통해 돈을 지불하기 때문에 누군가 중간에 손을 댈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 카드를 통한 보조금 지급정책은 매우 제한적으로 집행되고 있다”(라미로 살보체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교수)는 지적도 있다.

한편에서 이런 ‘선물의 정치’가 벌어질 때 공공의료와 공공교육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안전망은 헐겁다. 직업군에 따라 조직된 노동사회보험(Obras Sociales)이나 민간보험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공공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르헨티나 인구는 2008년 현재 약 37.62%에 달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두란병원에서 만난 간호사 릴리아나 곤살레스(40)는 “2000년대 초 경제위기 이후 민간보험에 돈을 내지 못하는 계층이 늘어나면서 공공병원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며 “하지만 인력과 약품, 장비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라고 말했다. 병원 입원실 직원인 툴리오 호세 루이스(49)는 “상황이 이렇다보니 새벽에 일찍 와야 당일에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며 “초진을 받고 전문의한테 진료를 받기까진 짧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4개월까지 걸린다”고 말했다.

건강한 민주주의가 자리잡지 못하면 건강한 복지도 자리잡기 어려운 셈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손혜현 박사는 “페론주의의 영향과 카우디요(보스) 중심의 남미 정치문화는 소득재분배가 이뤄지는 유럽식의 보편적 복지를 이 나라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했다”며 “제도권에서 분배돼야 할 재원이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분배되는 등 아르헨티나의 복지는 정권이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시혜적으로 뿌리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최민영·송윤경·유정인·김지환·박은하 기자
■ 블로그 welfarekorea.khan.kr
■ 이메일 mi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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