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파견+계약 4년 채우고도 ‘탈락’… 악용 땐 비정규직만 8년

2015.03.26 22:32 입력 2015.03.26 22:52 수정
강진구 기자

(2) 기간제 4년 연장의 허상

▲ 기업들 4년 계약직 우선 채용… 정규직 채용 기회 되레 줄어
퇴직금·이직수당 등 유인책… 기간제 임금 낮아 실효 없어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2년간 계약직 전문위원으로 일한 ㄱ씨(34)는 지난해 5월 억장이 무너졌다. 무기계약 전환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별일 없으면 무기계약으로 전환될 거라는 간부들의 약속을 믿고 정규직과 다름없이 최선을 다해 일했다고 생각한 조직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3년11개월간 일했다. 공공기관 청년인턴으로 11개월, 파견직 1년을 거쳐 계약직으로 2년을 더 근무했다. 4년에서 딱 한 달 모자라는 황금 같은 청춘기를 비정규직 전문위원으로 보낸 셈이다. 그는 “인턴계약 만료 후 바로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일하면서 근로 형태만 파견으로 바뀌었다”며 “인턴과 파견기간 때는 ‘소재평가팀’에서 계약직 때는 ‘연구장비관리단’으로 소속만 바뀌었을 뿐 4년간 동일 업무를 담당했다”고 말했다.

<b>마주 앉은 노·사·정</b> 이완구 국무총리가 26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노사정위원회의 노동시장 구조 개편을 놓고 대치 중인 노·사·정 대표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박병원 경총 회장, 이 총리,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 김대환 노사정위 위원장. | 김기남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마주 앉은 노·사·정 이완구 국무총리가 26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노사정위원회의 노동시장 구조 개편을 놓고 대치 중인 노·사·정 대표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박병원 경총 회장, 이 총리,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 김대환 노사정위 위원장. | 김기남 기자

실업자가 된 ㄱ씨는 막막했다. 대학 졸업 후 인턴으로 들어올 때는 전직 기회도 찾아볼 수 있는 29살이었지만, 어느덧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 직장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돼 안정된 신혼생활을 꿈꾸던 시점에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무너진 것이다.

ㄱ씨의 아픔은 지난해 12월29일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이 얼마든지 현실과 거꾸로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간제 노동자의 총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자는 발상이 기간제 노동자의 지위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독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구상은 35세 이상 노동자가 동의할 경우 기간제 2년을 4년으로 늘려 고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는 기간제로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이나 무기계약직으로 고용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계약직으로 근무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숙련이 쌓여 사용자 입장에서는 새로 사람을 뽑기보다 기존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며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장관의 설명에 고개를 흔들었다. 인턴·파견·기간제로 고용 형태만 바꿔가며 무려 4년을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잘린 ㄱ씨와 같이 악용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수도권 공단의 중소기업을 자문하고 있는 ㄴ노무사(42)는 “기간제 사용기간이 4년으로 늘어나면 대부분 기업들은 우선 계약직으로 4년간 써본 후 정규직 채용을 결정하려 할 것”이라며 “입직 단계에서 정규직 채용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거꾸로 가는 노동 개혁]인턴+파견+계약 4년 채우고도 ‘탈락’… 악용 땐 비정규직만 8년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에는 파견직 사용기간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한다는 방침이 담겼다. 사업주가 나쁘게 마음먹으면 파견으로 4년간 근무시킨 후 다시 기간제로 4년을 더 돌려 총 8년을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실제 지난해 말 한 건설사 기숙사에서 일하던 여사원은 사소한 시비로 상사와 다툰 게 빌미가 돼 계약 갱신에 실패한 후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그는 자회사·본사로 소속만 바뀌며 7년간 계약직으로 근무해왔다.

이렇듯 사용자가 우월적인 지위 속에 계약 갱신을 결정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기간 연장 시 노동자의 동의를 거치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대책도 노동현장에서는 실효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2년 기간제로 근무한 노동자가 내심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싶어도 사용자가 2년 더 계약직 근무를 제의하면 쉽사리 뿌리치기 힘든 게 실직 공포가 큰 비정규직의 암울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간제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유인책도 도마에 올라 있다. 정부는 3개월 이상 근무 시엔 퇴직금을, 2년 사용 후 계약 해지 시엔 한 달치 이직수당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정규직 전환을 강제하는 수단으로선 한계가 있다. 방송통신대 윤애림 교수는 “기간제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 수준이 정규직의 54.8%에 불과한 상황”이라며 “사용자로서는 퇴직급여와 이직수당이 추가된다 해도 정규직 대신 기간제를 사용하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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