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미드’는 노조의 힘···노조가 마련한 ‘170쪽 협약서’로 개별 보호

2018.09.03 18:32 입력 2018.09.03 21:05 수정

미국 CBS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시즌12> 스태프들이 지난 2016년 12월 드라마 세트장에서 촬영한 영상을 살펴보고 있다. ‘크리미널 마인드 셋리포트’ 공식 트위터 갈무리.

미국 CBS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시즌12> 스태프들이 지난 2016년 12월 드라마 세트장에서 촬영한 영상을 살펴보고 있다. ‘크리미널 마인드 셋리포트’ 공식 트위터 갈무리.

한국에서도 팬층이 두터운 미국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와 <CSI 과학수사대>. 미 연방수사국(FBI)의 프로파일링 전문팀과 CSI 과학수사대가 범죄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내용의 두 드라마는 화려한 볼거리와 긴장감 있는 전개가 특징이다. 촬영현장은 어떨까. 약 7년간 미국에서 촬영스태프로 있다가 지금은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ㄱ씨는 <크리미널 마인드>와 <CSI : 라스베가스>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줬다.

“그곳 촬영은 보통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7시에 끝나요. 6시쯤 되면 철수를 준비하죠. 부득이하게 저녁에도 찍어야 한다면, 스태프들로부터 사전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당연히 연장수당이 붙습니다. 한국이요? 단톡방에 ‘계속 하겠습니다’ 공지 올라오는 게 끝이잖아요.”

미국 스태프의 노동시간이 ‘오전 10시~오후 7시’라면, 한국 스태프는 ‘오전 7시~다음날 새벽 3시’다. ㄱ씨는 대부분의 미국 드라마는 하루 4~5신(scene·드라마나 영화를 구성하는 단위)을 찍는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은 미니시리즈의 경우 하루 15~20신, 아침드라마는 20~35신까지 찍는다. 촬영 분량이 많은데다가 방영 일자는 정해져있으니, 스태프들의 노동량은 그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같은 촬영현장을 바꾸기 위해선 드라마 사전제작 시스템이 자리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취재진이 만난 스태프들은 한국에선 사전제작을 해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호소한다. 새벽까지 촬영하고 다시 아침에 모이는 ‘디졸브’ 노동 관행이 워낙 깊게 뿌리내린 탓이다. 실제로 사전제작 중인 <킹덤>의 경우 올해 1월 미술 스태프가 귀가 중 어지럼증을 호소하다 쓰러져 사망했다.

사전제작은 촬영일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스태프들도 전문가로서 존중받는 제도와 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 제도와 문화는 제작사·방송사의 ‘도덕성’에 호소해서 이뤄지지 않는다. 스태프들의 조직이 제작사와 대등한 ‘파트너’로서 협상을 하고 세세하고 명확한 계약서를 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라마 선진국에선 스태프들의 계약서가 책 한권 분량이다”

해외 드라마 업계를 경험한 한국의 드라마 PD들과 스태프들의 전언은 거짓이 아니었다.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영국과 미국에선 각각 스태프 노조나 연맹을 꾸려 제작자 단체와 단체협약을 맺고 있었다. 단체협약에선 근무시간, 초과근무수당 등을 비롯한 ‘기준’을 만든다. 각 스태프들은 이 기준을 바탕으로 제작사와 개별계약을 맺는다. 이것은 단지 계약조건이 촘촘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태프들이 전문가로서 그만큼의 대우를 받고 있음을 뜻한다.

‘크리미널 마인드 셋리포트’ 공식 트위터 갈무리.

‘크리미널 마인드 셋리포트’ 공식 트위터 갈무리.

■초과근무수당 등 근무조건 빼곡한 계약서

‘촬영이 끝나고 다음 촬영까지 최소 11시간 쉬어야 한다.’ ‘10시간 기준이면 10시간 촬영하고 그 안에 1시간 무급 식사시간을 갖거나, 공식적인 휴식 없이 9시간을 촬영한다.’ ‘초과 근무는 시간당 35파운드(약 5만 원) 이상으로 계산된다.’ ‘노동자에게는 공휴일을 포함해 연간 5.6주의 유급휴가가 주어진다’

영국 방송예능영화공연노조(BECTU)가 지난해 5월 외주제작사를 대표하는 영국독립제작사협회(PACT)와 맺은 TV드라마 부문 협약내용이다. 20페이지 가량의 이 협약서에는 “제작자는 계약 전 스태프에게 협약서의 내용을 설명하고 계약 세부사항이 담긴 문서를 제공한다”는 단서조항도 달았다. 계약은 스태프 개인별로 이뤄지지만 계약조건은 이 협약을 바탕으로 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스태프 상당수는 극장무대기술자연합(IATSE)에 소속돼 있다. IATSE가 영화·TV제작자 협회와 협약을 맺으면 개별 스태프들은 이 협약에 명시된 근무조건을 기준삼아 계약한다.

이를테면 협약서에는 주 5일 근무를 기준으로 한 임금표가 제시돼 있다. 또 초과 근무시 수당을 2배 가량 지급하도록 했다. 또한 매년 안정적으로 임금이 오를 수 있도록 보장한다. 2015년 8월부터 올 7월까지 효력을 가졌던 협약서는 170페이지에 달한다. 의료보험, 퇴직연금, 안전교육, 직종별 임금 등에 관한 규정이 세세하게 나와있다. 협약은 주기적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지난 7월 IATSE는 3년 간의 새로운 임시 협약을 맺었다. 매해 임금을 3% 인상하고 건강보험과 연금혜택도 삭감없이 보호받도록 하는 내용이다.

물론 미국에서도 촬영스태프들이 장시간 노동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계약서에 따라 추가수당과 휴식시간을 확실히 보장받는다. 새 협약에선 하루 14시간 넘게 일하는 스태프에게 그동안보다 더 많은 휴식을 보장하고, 왕복 교통비와 숙소도 제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최종 협약서에는 더 상세한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크리미널 마인드 셋리포트’ 공식 트위터 갈무리.

‘크리미널 마인드 셋리포트’ 공식 트위터 갈무리.

■연대로 힘을 키웠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스태프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들 나라 스태프들의 ‘인간다운’ 노동은 정부의 불공정거래 개선 노력과 스태프 스스로의 연대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국에선 드라마를 만드는 외주제작사가 방영권을 쥐고 있는 방송사로부터 수익을 제대로 배분받지 못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제작사들은 스태프에게 제대로 된 처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2003년 커뮤니케이션법이 제정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 법은 영국 커뮤니케이션청(Ofcom)이 외주제작 가이드라인을 만들면, 방송사들이 이를 참고해 외주제작사와 공평하게 수익을 공유하기 위한 시행규칙을 마련하도록 했다. 커뮤니케이션청의 가이드라인은 공영방송을 포함한 모든 방송사에 적용된다. 영국 공영방송 BBC의 시행규칙은 계약 진행, 저작권 배분. 제작비 분쟁해결과 같은 항목을 세부적으로 규정하고, 표준제작비까지 제시한다. 방송 프로그램을 드라마, 예능, 교양, 어린이 4개 분야, 32개 항목으로 나눠 시간당 제작비 범위를 명시했다.

외주제작사가 방송사와 수익을 공평하게 분배받게 되면서 제작사에 고용된 스태프들의 처우를 개선할 여지가 생겼다. 스태프들은 힘을 합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1991년 설립된 BECTU에는 카메라, 조명, 음향, 분장, 소품 등 방송 제작과 관련된 모든 직종의 스태프들이 모여있다. 미국 역시 스태프들이 연대해 힘을 키웠다. 미국 드라마 스태프 상당수가 소속된 IATSE는 1893년 극장 무대 노동자들이 설립했으나 지금은 미국과 캐나다 예능 분야에서 기술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의 단체로 몸집을 키웠다.

미국도 ‘스타 작가’, ‘스타 PD’를 찾는 건 마찬가지다. 유명한 PD나 작가, 스태프는 까다로운 근무조건과 높은 임금을 제시할 수 있다. ‘스타’들과 달리 스태프는 개별적으로는 권리를 주장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노조나 협회에 소속되어 있고 이들 조직을 통해 보호받는다. IATSE 외에도 감독조합(DGA), 작가조합(WGA) 등이 힘을 자랑한다.

‘크리미널 마인드 셋리포트’ 공식 트위터 갈무리.

‘크리미널 마인드 셋리포트’ 공식 트위터 갈무리.

2007년 11월부터 100일간 지속된 미국 작가노조의 파업은 노조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당시 파업은 거대 제작사의 수익은 날로 느는데 작가 수입은 변함이 없는데 대한 반발에서 시작됐다. 배우노조가 작가노조를 지지하는 뜻으로 골든글로브 시상식 참석을 거부하면서 권위있는 시상식까지 취소되는 전례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1만2000명이 동참한 파업으로 작가들은 뉴미디어 부문 저작권 수익을 얻게 됐다.

한국의 외주 제작 현실은 과거 영국을 닮았다. 방송사는 편성을 지렛대로 제작사에 외주를 주면서 제작비는 충분히 지급하지 않는다. 방송사는 저작권을 가져가면 제작비의 60~70%, 제작사가 가지면 50% 미만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제작비가 부족한 제작사들은 광고 및 협찬으로 제작비를 채우고, 이를 위해 ‘쪽대본’을 불사한다. 스태프의 노동시간은 늘리고 임금을 깎는다. 이 때문에 한국도 영국처럼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간 ‘불공정거래’를 바로잡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스태프들이 연대해 직접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나설 수 있도록 협상력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스태프 조합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최근 방송스태프노조, 한빛노동미디어인권센터 등이 결성됐지만, 아직 방송자·제작사와 협상을 할 ‘파트너’로서의 위치를 갖진 못한 상황이다. 전직 드라마 PD인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 만큼 국가기관이 5년 정도는 스태프들이 협상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후 스스로 자생적으로 (제작자들과) 협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미국 방송 편집자 문성환씨 “미드, 일과 일사이 8시간 휴식 보장···추가 노동 땐 1.5배 임금”

드라마는 방영시간이 길고, 촬영에 순발력이 필요하다. 이는 짧은 시간, 많은 노동력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미국의 방송 스태프들도 장시간 노동을 감내한다. 하지만 한국의 방송 스태프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미국 텔레비전 업계에서 편집 스태프로 일하는 문성환씨(43·사진)는 경향신문과의 e메일 인터뷰에서 “한국과 미국의 다른 점은, 기본 근무 시간을 넘었을 때 그에 대해 임금으로 충분히 보상받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미국의 촬영장 스태프, 편집자도 1일 12시간 근무를 하곤 한다”며 “내 경우 주 45시간 이상의 추가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1.5배의 임금을 받았다”고 전했다. 문씨는 2012년 도미해 <오리지널스> <볼드 타입> <제인 더 버진> 편집팀에서 보조편집자로 일했다.

미국 방송편집 스태프로 일하는 문성환씨

미국 방송편집 스태프로 일하는 문성환씨

- 미국과 한국의 드라마 제작환경을 비교했을 때 가장 다른 점은.

“편집의 입장에서 가장 다른 점은 방송사 최종 납품까지의 편집 기간이다. 일반 공중파 방송 드라마를 기준으로 감독과 편집자, 프로듀서, 작가, 프로덕션, 방송사들이 단계적으로 참여하는 편집 기간이 1~4주 정도 걸린다. 후반 작업 기간까지 포함하면 에피소드 한 편을 만드는 데 4~9주 정도 걸린다. 이에 반해 한국은 편집 기간 동안 연출자나 프로듀서 등이 편집자와 긴밀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부족하다. 한국 드라마 <아이리스>에 참여했을 때는 저녁 때 방송에 나갈 에피소드의 촬영이 당일 새벽에야 끝난 적도 있었다. 미국 시스템이 무조건 좋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미국의 경우 드라마의 방향을 정하는 ‘사공’이 많은 데 반해, 한국은 의견 통합이 더 쉽다고 볼 수도 있다.”

- 한국 드라마 스태프의 노동환경이 열악한 이유는 시일이 촉박한 제작환경 탓이 크다. 미국 드라마는 모두 사전제작을 하나.

“그렇지 않다. 넷플릭스의 <하우스 오브 카드>나 <마인드 헌터>는 모든 에피소드를 제작한 뒤 한꺼번에 공개했다. 하지만 공중파 드라마는 사전제작할 때도 있지만, 방송분이 해당 주에 납품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작가가 촬영 직전에야 대본을 완성해 현장에 보내는 한국식의 ‘쪽대본’은 없다. 대사를 조금 고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문성환씨가 <볼드 타입> 시즌1 편집팀에서 일하기 전 작성한 계약서. 주 기본 근무시간 45시간으로 명시되어 있다. 하루 8시간 또는 주 40시간 넘게 일할 땐 추가 노동시간은 임금의 1.5배를 적용한다고 나온다. 문성환씨 제공

문성환씨가 <볼드 타입> 시즌1 편집팀에서 일하기 전 작성한 계약서. 주 기본 근무시간 45시간으로 명시되어 있다. 하루 8시간 또는 주 40시간 넘게 일할 땐 추가 노동시간은 임금의 1.5배를 적용한다고 나온다. 문성환씨 제공

- 미국의 스태프들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나. 스태프들은 노동시간과 임금을 어떻게 보장받나.

“영화와 TV 분야에서 스태프의 장시간 노동은 사실 한국만의 특이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 강도는 다르지만 이 분야는 어디에서나 근무 시간이 긴 편이다. 다만 한국과 미국이 다른 것은 기본 근무 시간을 넘었을 때 그에 대해 제대로 임금을 보상받는지 여부다. 제작사들의 연합인 AMPTP와 스태프 노동조합인 IATSE 사이에 맺은 단체협약과 프로젝트별 개별 계약에 의거해 기본 근무시간, 휴식시간, 초과근무 수당 등이 결정된다. 주 5일 근무는 최대한 지켜지는 편이다. 또한 전날 일이 끝났을 때부터 다음날 일을 시작할 때까지 8시간 이상의 휴식을 보장해주도록 정해져 있다.”

- 한국 스태프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지.

“감독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의 노동환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변하는 것은 없다. 세상 어디나 최소의 자본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내고자 한다. 다만 ‘최소’가 ‘기본 이하’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 바닥이 원래 그래’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라는 핑계가 사라지길 바란다. 아울러 방송사에서 제작비를 늘려야 현장에서도 스태프들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 제작비를 늘리지 못하면 방송 횟수를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부족한 돈으로 억지로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려니 탈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제도적으로도 각 분야 스태프들의 조합이 좀 더 힘을 가질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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