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하루 20시간 ‘디졸브 노동’…카메라 뒤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2018.09.01 06:00 입력 2018.09.01 10:32 수정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하루에 17시간 일한다. 일하다 졸고 졸면서 일한다. ‘타이밍’ 먹으면서 재봉틀 돌리던 1970년대 평화시장 이야기가 아니다. 스타 배우가 출연하고, 거대 방송사에서 방영되며, 때로 해외에 수출돼 큰돈을 버는 2018년 한국 드라마 촬영장 이야기다.

 이들 스태프의 노동은 두 개의 화면이 겹치는 영상 기법인 ‘디졸브’ 노동으로 통칭된다. 새벽까지 일한 뒤 아침에 다시 모여 일한다. 일은 또 새벽까지 이어진다. 스태프들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이렇게 일한다.

 <혼술남녀> <화유기>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그리고 방영을 앞둔 대작 <킹덤>. 최근 2년간 스태프가 사망했거나 큰 사고를 당한 드라마다. 스태프들은 식사시간, 이동시간 빼고는 쉴 틈이 없다. 촬영하면 바로 방영하는 ‘생방송 드라마’ 체제가 만연한 까닭이다. 세트장은 허술하고 웬만한 안전사고는 그냥 넘어간다. 말 그대로 죽도록 일한다.

 ‘죽도록 일하다 진짜 죽는’ 드라마 스태프들의 현실은 최근에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방송스태프노조, 한빛노동미디어인권센터가 만들어지면서 스태프들은 촬영현장의 실태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송사와 제작사의 변화는 더디다. 죽음과 사고가 잇따라 세상에 드러난 후에도 드라마 촬영현장엔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스태프들의 한결같은 얘기였다. ‘원청’인 방송사의 뉴스에는 자사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스태프가 죽어도 전혀 보도되지 않는다. 제작사는 스태프들의 수면·휴식 시간까지 통제하지만, 정작 사고가 나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스태프가 죽든 말든, 드라마의 시청률은 고공행진이다. 제작사는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저연차 스태프들은 최저임금 수준만 받는다. 근로기준법을 피해가려는 꼼수도 판친다. “이거 한번 싹 뒤엎어야 해요.” 한 스태프는 화를 내듯 말했다.

 경향신문 취재진은 스태프들의 노동 현실을 들여다보기 위해 드라마 현장스태프 18명과 인터뷰했다. 각 스태프가 참여 중인 작품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가상의 드라마를 전제로 그들이 착취당하는 구조를 집약했다. ‘17시간 노동’이라는 숫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스태프들의 고통을 그려보기 위해서다. 고용노동부와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가 지난해 드라마 스태프 11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들은 1일 평균 17시간, 1주 80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 드라마 설정만 가상일 뿐 스태프들의 발언, 출퇴근 시간, 노동구조, 임금, 각종 사건사고는 모두 취재를 통해 취합한 것이다.


한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 촬영현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 촬영현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스태프들이 사는 세상 … “마이크 들고 잠 못 자?”

 #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재벌그룹 총수의 운전기사 시신이 한강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 내리지만, 그의 아들 준호는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준호는 가족사진 액자 안쪽에 붙어 있는 이동식저장장치(USB)를 발견했다. 준호가 USB의 영상을 확인하려는 찰나, 폭력배로 보이는 무리가 집 안으로 들이닥친다. 준호는 창문 밖으로 빠져나와 골목길을 미친 듯이 달린다.

 “컷, 다시 갈게요.”

 “하아….” 붐 오퍼레이터 김학수씨(가명)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각종 신기록을 갈아치운 2018년 여름 폭염 속의 추격 신(scene·드라마나 영화를 구성하는 단위). 온몸이 땀에 젖었다. 골목길 전체를 보여줘야 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붐마이크와 붐마이크를 지탱하는 ‘붐대’가 화면 속에 보이면 안된다. 그래서 붐대를 최대 길이로 뽑아 둔 터였다. 붐대는 길게 뽑을수록 무거워진다. 붐대를 거둬들여 짧게 포갠 뒤 무릎 아래로 떨어뜨려 쥐었다. 손에서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다. 누군가 실수로 밟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

 몇 분 뒤 감독이 다시 ‘큐’를 외쳤다. 준호가 뛰는 장면부터 다시 시작한다. 김학수씨는 붐대를 치켜들고 주인공과 거리를 둔 채 앞서서 달린다. 주인공이 뛰기 시작하면 김씨도 뛴다. 그는 간간이 뒤를 돌아보면서 본인이 배우와 간격을 잘 두고 뛰는지, 중간에 장애물은 없는지 확인한다. 골목길 끝까지 달렸을 때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컷, 오케이.”

 김씨는 카트가 놓인 곳까지 터덜터덜 걸어가 그제야 비로소 장비를 손에서 놓았다. 이날 새벽 4시까지 촬영을 마치고 겨우 씻기만 한 다음, 오전 7시부터 다시 촬영을 시작한 터였다. 잠은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잔 것이 전부다. 16부작 미니시리즈를 시작하면 이런 식으로 족히 3~4개월은 버텨야 한다.

 현재 시각 오후 2시. 벌써부터 몸이 천근만근이다. 외진 곳을 찾아 담배를 꺼내 물고 촬영 일정표를 들여다봤다. ‘얼마나 남았지?’ 아직 네 신밖에 못 찍었다. 오늘 안에 20신은 찍어야 한다. 아침드라마는 하루에 25~30신씩 찍기도 한다.

 이날도 촬영은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조폭들을 겨우 따돌린 주인공 준호가 한밤중에 장대비를 맞으며 걷는 신. 김씨는 붐마이크가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 털소재의 커버를 몇 겹씩 둘렀다. 촬영이 시작되자 살수차가 뿌리는 비가 털커버에 스미기 시작한다. 물을 잔뜩 머금은 마이크 커버는 갈수록 무거워진다. 피곤에 절어 있던 김씨는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붐마이크가 떨어져 배우 어깨에 맞았다. 감독이 고성을 내질렀다. “똑바로 안 해?” 한 선배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야, 마이크 들고 잠 못 자? 마이크 들고 잘 수 있어야 진짜 붐 오퍼레이터야.”

■하루 17~20시간 노동…“12시간만 일하고 싶다”

 # 아버지가 남겨놓은 USB를 아직 뺏기지 않은 준호가 ‘장실장’이란 사람의 연락을 받고 만난다. 장실장은 재벌 총수가 보낸 사람. 둘은 교외의 으슥한 곳에서 대면한다. 준호와 장실장은 의미심장한 대사를 주고받는다.

 이 신을 준비하기 위해 조명팀의 막내 스태프인 박재범씨(28·가명)는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움직였다. 자체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만드는 발전차에서 전선을 끌어와 조명장비에 연결한다. 카메라 앵글에 맞게 4㎾짜리 커다란 조명을 여기저기 심는다. “ ‘샤’하고 ‘플로피’ 가져와.” “바람 부니까 꼭 잡고 있어.” 무전기가 연결된 이어폰에 각종 주문이 쏟아진다. ‘샤’는 조명 앞에 대면 빛이 화사하게 퍼지도록 만드는 장비다. ‘플로피’는 빛을 가리는 검정 막과 같은 장비다. 특히 ‘샤’는 얇은 비닐이나 천 소재이기 때문에 “구멍 나지 않게 조심해”라는 말을 신물이 나게 듣는다. “인물에 노출 좀 더 때려라.” “조명 더 올려.” 조명팀 막내 스태프는 활동량이 가장 많은 스태프 중 하나다. 만보기로 하루에 3만보, 4만보를 찍는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박씨는 종종 모니터를 슬쩍 확인한다. 빛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이렇게 도제식으로 배워간다. 박씨의 선배는 “정답이 없어. 화면에 어떻게 잡히는지 보면서, 깨지면서 성장한다고. 현장에서 구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어”라고 말했다.

 “컷, 오케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 신이 끝나면 40여명의 스태프가 이렇게 조용해진다. 박씨의 선배는 촬영이 순조롭다고 생각했는지 “스케줄은 지워가는 맛이지”라고 기분 좋게 말했다. 그러나 촬영이 빠르게 진행된다 싶으면 느닷없이 새로운 촬영 일정이 추가되곤 한다. 결국 이날도 네 신이 추가됐다. “오늘도 아침 해 보면서 끝나는 거 아냐?”

 도제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선배들도 살인적 스케줄 앞에선 무력감을 토로한다. 이미 사나흘 간격으로 하루 17~20시간씩 두 달을 버텨온 터라 새벽녘이 되면 현장 스태프들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체력이 좋은 20대 남성도 버티기가 쉽지 않은 곳이 드라마 촬영현장이다. 한 스태프는 말했다. “많은 것은 바라지도 않아요.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었으면 좋겠어요.” 이들의 기호품은 딱 세 가지다. 담배, 커피, 에너지드링크.

[한국 드라마-스태프들의 지옥] ① 하루 20시간 ‘디졸브 노동’…카메라 뒤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찜질방에서 씻고 나오면 그게 ‘출근’”

 월·화요일 혹은 수·목요일에 방영되는 16부작 미니시리즈는 보통 방송 시작 전 4회 분량을 찍어둔다. 하지만 2주 방영된 후 촬영분량이 동난다. 이후로는 일주일 동안 찍고 방영 직전 편집해 바로 방송하는 ‘생방송’ ‘라이브’ ‘날방송’이 시작된다. 스태프들은 곧 방영할 분량을 어떻게든 촬영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하루 20시간을 넘나드는 고된 스케줄을 버틴다. 이 즈음 시작되는 근무체제가 바로 ‘디졸브’다.

 디졸브 노동은 이런 식이다. 전날 오전 7시에 시작한 촬영이 다음날 새벽 4시에 끝난다. 그런데 ‘콜타임’(스태프 집합시간)은 3시간 뒤인 오전 7시다. 집에 가서 씻고 자고 할 수가 없다. 스태프버스가 서울 여의도나 상암동에 도착하면, 집에 가는 대신 찜질방에 간다. 그리고 씻고 나와 다시 버스를 탄다.

 “스태프버스를 여의도에 대고 나서, ‘자, 씻고 나오세요’라고 지시를 해요. 씻고 나와서 버스를 타면, 그게 다시 ‘출근’인 거예요.” 김학수씨가 말했다. 그는 “씻는 걸 포기하고 버스에서 그냥 자는 스태프들도 많다”고 했다. 특히 여의도 63빌딩 옆 지하 사우나는 스태프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SBS 일산제작센터 앞에는 아예 지정 사우나가 있다. 스태프들은 자신의 이름과 드라마, 소속 파트를 적고 바로 들어간다.

 디졸브 노동은 숱한 안전사고와 죽음을 부른다. 졸음운전에 따른 교통사고가 가장 많다. 장비팀 스태프들은 장비를 싣는 차량을 직접 운전해야 한다. 드라마 촬영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한다. 경남 거제에서 오후 10시에 촬영이 끝났는데 다음날 오전 7시 인천공항에 집합하라는 식으로 지시가 내려온다. 이미 몇 달간의 디졸브 근무로 쪽잠밖에 못 잔 상태에서 운전을 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여의도를 지나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안 나고 깨어 보니까 제가 인천공항 쪽으로 차를 몰고 있더라고요. 그럴 때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요.” 한 장비팀 스태프의 말이다.

 실제로 2012년 KBS 수목드라마 <각시탈>의 보조출연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이듬해엔 JTBC 주말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스태프 2명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JTBC에서 2014년 방영된 <달래된, 장국>의 스태프 2명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KBS 대하사극 <대왕의 꿈>에서는 교통사고가 두 차례 일어났는데 장비 트럭을 몰던 스태프가 숨졌고, 분장팀 스태프 7명은 중상을 입었다. <대왕의 꿈>에선 선덕여왕 역의 배우 박주미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역할이 배우 홍은희씨로 교체되기도 했다.

■방송사 뉴스엔 안 나오는 스태프들의 죽음

 # 준호가 갖고 있는 USB를 없애버리기 위해 장실장은 준호의 집에 불을 지르기로 결심한다.

 스태프들은 잔디밭 위에 합판으로 가건물을 만들어놓고 화재현장을 찍었다. 이 신 하나를 찍는 데 이틀이 걸렸다. 이 무렵은 ‘폭염경보’ ‘폭염특보’가 잇따르던 때였다.

 8년차 조명팀 스태프는 “뉴스에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폭염대책을 말하는데 우리한테는 딴 세상 얘기였다”고 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폭염경보가 발령된 날에 공공 발주 건설공사의 작업을 중지케 하고 임금손실을 보전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뉴스가 보도된 이후에도 화재 신을 찍는 촬영현장은 계속 돌아갔다. 이 스태프는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었고 나중엔 털썩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면서 “제작진이 스태프들이 쓰러지는 걸 막으려고 포도당과 소금, 얼음물을 갖다놓기는 했지만 촬영을 멈추진 않았다”고 했다.

 스태프들은 크고 작은 사고 하나쯤은 이력처럼 지니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촬영을 감행할 때 조명팀 스태프는 전기를 자주 ‘먹는다’. 낮은 수준의 감전을 이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막내급’ 조명 스태프는 “비오는 날 라이트를 올리다가(조명장비를 설치하다가) 찌릿찌릿함을 느끼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장비에 전원을 연결하다가 감전에 놀라 소리치며 뛰쳐나가는 스태프도 있었다고 했다.

 배우가 운전하는 장면을 찍는 ‘레커차 촬영’도 위험하다. 레커차에 자동차를 얹고 남은 공간에 스태프들이 들어가 장비를 들고 버틴다. 한 스태프는 레커차 위에 있던 자동차가 미끄러지면서 발등이 그대로 밟혔다. 레커차에서 내려오다가 도로 외벽 철근에 이마가 찢어진 스태프도 있었다. 당장 몇 바늘 꿰매야 할 상황인데 당시 제작부서에서는 “급하니까 반창고 붙이고 하자”고 말했다.

 세트장 촬영도 사고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방영된 tvN 드라마 <화유기>에서 소품팀장 이모씨는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세트 천장에 샹들리에를 달다가 천장이 무너져 하반신이 마비되는 사고를 당했다. 2014년부터 방영된 JTBC <하녀들>에서는 점심시간에 세트장에 있던 스크립터가 화재사고로 숨졌다. 고인이 있던 세트장 건물은 지자체로부터 사용승인을 받지 않은 곳이었다.

 방송사와 제작사는 스태프가 다쳐도 책임지지 않는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했으니 산재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나마 최근에는 상해보험에 가입시키고 병원비를 대는 제작사가 늘긴 했지만 이는 ‘의무’가 아니라 ‘선의’로 포장된다. 계약과정에서 안전 문제와 사고 등에 관한 조건을 명확히 하는 사례는 드물다.

 사고를 당하는 스태프들은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을 한다. 장비팀의 한 스태프는 지난해 다리가 부러져 1년간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차량에 장비를 싣다가 승용차에 치었다. 당시 제작사 측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긴 촬영장이 아니지 않아요?”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얘기였다. 화가 치밀었다.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아무리 자부심을 느끼면서 일해도, 난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저들에게 난 소모품일 뿐이구나.”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SBS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의 촬영 스태프 김모씨가 지난 1일 숨진 채 발견됐다. 방송스태프노조는 김씨가 직전 5일간 76시간을 일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휴무 이틀째에 라면을 끓여놓고도 미처 먹지 못한 채 숨졌다. 그의 사망 직후 애도 성명을 냈던 제작사는 곧 “지병에 따른 뇌출혈이 사인”이라면서 “과로사가 아니다”라는 입장문을 냈다. 포털사이트에서 <서른이지만…>과 ‘스태프 사망’으로 뉴스 검색을 하면 제작사 입장을 전하는 기사부터 나열된다. 과로사 가능성을 언급한 기사들은 뒤로 밀려버렸다.

 “지병이요? 그렇게 작품을 많이 했는데 심각한 지병이 있었으면 가능했겠어요?” 동료 스태프들에 따르면 고인은 활발하고 밝았다. 많은 작품을 했기 때문에 그와 웃고 떠들던 시간을 기억하는 스태프들이 많았다. 고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날 <서른이지만…>의 스태프들은 촬영장 한편에 숨어 숨죽이며 울었다고 한다.

 고인과 친구라는 한 촬영 스태프는 “제발 사인을 명확하게 파헤쳐줬으면 좋겠다”면서 “SBS 같은 방송사들은 이런 걸 뉴스로 아예 다루지 않으니 그들과 대적할 언론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소품팀장은 “우리가 찍는 드라마가 MBC, KBS, SBS, JTBC같이 영향력 있는 방송사에서 송출되는데, 정작 이 방송사들의 보도국은 스태프들이 죽어나가도 관심이 없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SBS·KBS·MBC의 뉴스에선 자사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를 찍다가 사망한 숱한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단신으로도 다루지 않았다. JTBC는 <하녀들>의 세트장 화재사고만 한 차례 보도했다.

 방송사가 직접 제작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KBS 드라마 제작국에서 만드는 단막극 <KBS 드라마 스페셜>은 방송사 PD와 작가에게 ‘입봉작’을 제작할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스태프들에게는 하루 24시간을 통째로 ‘갈아넣는’ 극악의 디졸브 노동 현장이다.

 단막극에 참여했던 한 스태프는 “PD는 신참이고 현장을 제대로 통솔하지도 못하는 데다 촬영은 길어지기 일쑤다. 오전 6시에 시작해 다음날 오후 1시에 끝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단막극의 하루 일당은 외주제작사의 드라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 팀장급 스태프는 “통상 미니시리즈의 경우 ‘통계약’을 할 때 조명팀은 일당 240만~250만원, 장비팀은 100만~150만원을 받지만 KBS 단막극은 조명팀 190만~200만원, 장비팀 50만~70만원 수준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근 견디다 못한 140여명의 장비팀장들이 단체로 KBS 단막극 보이콧을 선언했고 동시녹음팀, 조명팀도 참여했다. 올해부터 겨우 단가가 소폭 올랐다.

■‘생방송 드라마’… 결국 ‘돈’ 때문이다

 왜 한국 드라마는 스태프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생방송’ 체제로 돌아갈까. 취재진은 스태프 18명 외에 드라마 PD와 작가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등을 별도로 인터뷰했다.

 모두의 말을 종합하면 결론은 ‘돈 문제’다. 촬영팀을 제외한 조명·동시녹음팀 등은 주로 일대(일당)를 기준으로 임금을 받는다. 하루 12시간을 찍든, 18시간을 찍든 일대는 똑같으니 ‘생방송’이라는 막다른 길에 몰아붙여 놓고 많이 찍도록 하는 게 제작사·방송사에는 남는 장사다. 특히 일정을 짜는 스태프에게는 제작사가 인건비를 아끼라면서 웃돈을 얹어주기도 한다.

 실시간으로 찍어야 광고와 협찬을 유치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시청률이 급격히 오르는 드라마는 방영 도중에 광고가 줄줄이 붙는다. 드라마가 끝나고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도중에 뜨는 광고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관장’ ‘카페◇◇’. 시청률이 오를 듯 말 듯 할 때 제작진은 대본에 ‘임팩트’ 있는 에피소드를 끼워넣는다. 주인공을 죽이다시피 했다가 극적으로 살리는 식이다. 그러면 시청률에 탄력이 붙고 광고가 추가된다. 이른바 ‘막장’ 신이 이렇게 탄생한다.

 방영 도중 광고와 협찬이 붙으면 제작사와 방송사는 웃겠지만 스태프는 똑같은 임금에 노동량만 추가될 뿐이다. 9년차 촬영팀 스태프 이모씨는 “시청률이 오르면 새로 들어온 광고주의 매장 중에서도 일부러 장사가 안되는 곳에 가 배우들이 대화를 나누고 물건을 사는 신이 자주 추가된다”고 말했다.

 드라마 스태프들은 전문가이자 기술인이다. 하지만 ‘생방송 드라마’ 체제는 이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만든다. 16년차 촬영감독 김모씨는 “방송을 보면 그날 현장 스태프들의 컨디션이 보인다”고 했다. 배우의 시선을 틀어지게 촬영했거나, 드라마 내용상 밤에 일어난 일인데 동이 트는 하늘이 희미하게 보인다거나, 대사가 많은 신인데 컷이 두 개뿐이거나 할 때 촬영 당시의 ‘열악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스태프들은 고된 환경 속에서도 “오늘 조명 별로였나, 다르게 할 걸 그랬나” 하면서 ‘질’을 생각하지만, 방영 일정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도 사치다. “시청자는 모르겠지. 하지만 방송쟁이들은 안다고. 그게 창피하고 쪽팔린 거야.” 촬영감독 김씨가 한 말이다.

 소위 ‘대박’이 난 한국 드라마는 많고 방송사와 제작사는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스태프의 처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촬영팀의 고참 스태프로 렌즈 초점을 맞추는 포커스플러 이모씨(30)는 “드라마 촬영현장은 대한민국 내 모든 형태의 비정규직들이 모여 있는 집합소”라고 말했다. 40여명이 모인 촬영현장에서 정규직은 방송사 혹은 외주제작사의 연출과 촬영감독 정도다. 종편과 케이블 드라마에선 연출과 촬영감독마저 계약직인 경우도 많다. 나머지 인력은 계약직, 파견직들이다.

한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 촬영현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 촬영현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시간 일하고 일당 10만원 받는 ‘막내’들

 드라마의 스태프는 크게 촬영팀, 동시녹음팀, 조명팀, 장비팀, 소품팀 등으로 구성된다. 촬영팀을 제외한 음향·조명·장비팀은 주로 팀장이 외주제작사와 통계약(턴키계약)을 맺는다. 건설현장의 ‘오야지’를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스태프들이 자기 파트의 팀장을 그렇게 부른다. 각 팀장들은 자신의 팀원을 모집하고 직접 일당을 지급한다. 다만 촬영팀은 최근 팀원들도 개별적으로 외주제작사와 계약을 맺는 추세다.

 이를테면 조명팀의 경우 조명감독이 외주제작사와 일당 250만원 수준으로 계약하면, 팀의 최고참 스태프인 ‘퍼스트’ ‘세컨드’ ‘서드’ ‘막내’를 구하고, 조명장비에 전력을 공급할 발전차도 모집한다. 250만원에는 각 팀원의 인건비와 장비료, 발전차 대여료가 포함된다.

 조명감독에게 ‘고용’되는 스태프들은 별도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다. 계약은 사실상 ‘얼마 줄 테니 할래?’ 식으로 성사된다. 조명팀 퍼스트 이모씨는 “계약서란 걸 작성해본 일이 없고 작성했다는 사람을 본 적도 없다. 거의 100% 작성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조명팀의 경우 일당은 막내 10만~12만원, 3년차 이상인 서드는 15만원 이상 정도다. 경력 5년 이상인 세컨드는 17만~18만원, 8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퍼스트는 일당 20만원부터 시작한다. 막내 스태프는 현장에서 가장 대접받지 못하는 데다 임금 역시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일당 10만원을 받는 1년차 박모씨는 “일은 고되고, 차라리 월급을 주는 촬영으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많다. 아예 치를 떨고 다시는 드라마 현장에 오지 않겠다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드라마 촬영현장에선 구인난이 심각하다. 18년차의 한 조명감독은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다보니 각 팀 막내는 항상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으로 채워진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면 각 팀에서 막내들 한두 명이 다 빠진다.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이른바 ‘오야지’ 밑에서 일하는 팀원들은 일하는 형태는 ‘노동자’로 보이지만, 드라마 현장에서는 이들을 ‘프리랜서’로 생각하고 고용하는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며 “노동청도 이들을 ‘프리랜서’라고 보고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결국 소송을 통해 법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아직까지 ‘을’인 당사자들이 그런 시도를 한 경우는 없다.

한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 촬영현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 촬영현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주 68시간 규제 시작됐지만…‘디졸브’는 그대로

 그동안 근로기준법은 영화·드라마 등의 ‘흥행업’을 근로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해 왔다. 그러나 지난 2월 흥행업종도 근로시간 규정을 지키도록 근로기준법 개정이 이뤄졌다. 다만 이들 업종에 대한 주 최대 ‘52시간’ 적용은 1년 유예됐다. 대신 드라마 촬영현장에서는 이제 주 최대 68시간 노동규정을 지켜야 한다. 디졸브 노동이 횡행하던 촬영현장은 조금 달라졌다. 하지만 쥐어짜는 구조는 그대로다.

 동시녹음팀 막내 스태프 김진수씨(20대·가명)는 1주일에 3~4일 일한다. 하루 일당은 12만원. 3~4일 동안 제작사는 스태프들을 잇달아 60시간 넘게 일을 시킨다. 그렇게 해서 주당 ‘68시간 이내’라는 조항을 ‘지킨다’. 그리고 또 다른 팀을 가동해 똑같이 3일 동안 60시간 가까이 일을 시킨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스태프 한 명에게 1주일간 맡길 업무와 임금을 두 명의 스태프에게 절반씩 나누는 꼴이니 인건비 규모에 큰 변화가 없다.

 김씨 쪽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결국 하루 20시간 남짓 일하는 것은 똑같다. 임금도 어차피 일당이었으니 달라진 게 없다. 다만 일주일에 3~4일 쉴 수 있게 되었지만 대신 그날의 임금은 없다. 게다가 새벽 3시, 6시 초과 때 제작사가 지급하기로 한 ‘연장근로 수당’은 1주일에 사흘 잇달아 일하면, 마지막 날에만 지급된다.

 그나마 김씨가 참여 중인 드라마 제작사는 주당 68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축에 속한다. 인터뷰에 응한 스태프들은 아직도 1주일에 5~6일을 18시간씩 강행하는 제작사들이 많다고 했다.

 스태프들은 <서른이지만…>을 비롯해 <혼술남녀> <화유기> 등의 사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에도 큰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회에 잠시 파장을 일으킬 뿐 언론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드라마 시청률은 여전히 높았기 때문이다. “우리 이렇게 죽어도 하나도 안 이상하겠다.” 3년차인 촬영 스태프는 동료와 이런 농담을 나눴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한다는 게 소름 끼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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