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인 미만’ 재단당하는 안전…목숨은 다 하나다

2023.11.29 06:00 입력 2023.11.29 06:01 수정

‘50인 미만’ 중대재해법 적용 미루는 정부·여당

두 번 우는 소규모·영세 사업장 노동자들

‘50인 미만’ 재단당하는 안전…목숨은 다 하나다

“영세하다고 안전 봐주는 건
죽어도 된다는 뜻인가”
“소규모 현장들 장비 열악
몇만원짜리 안 갈아 사고”

업체 82%가 “준비” 답해도
정부는 “준비 안 됐다” 주장

“영세하고 열악하면 안전도 당연히 열악하죠. 영세하고 열악하다고 안전 문제를 봐준다는 건, 소규모니까 죽어도 된다는 것인가요?”(건설노동자 하동현씨)

정부·여당이 50인 미만 사업장(공사금액 50억원 미만 현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2년 더 미루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2021년 1월27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당시 ‘준비 부족’을 이유로 준 3년의 유예기간이 내년 1월27일로 끝나는데, 정부·여당은 ‘여전히 현장의 대비가 부족하다’며 이를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 현황 분석’을 보면 최근 3년 동안 산재 사고사망자의 80%는 ‘50인(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나왔다. 50인(억원) 미만 소규모·영세 사업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의 의견은 어떨까.

28일 경향신문은 소규모 건설현장과 제조업 사업장 노동자에게 ‘중대재해법 적용 유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노동자들은 “소규모 사업장은 지금도 안전 사각지대”라며 “중대재해법 적용 유예는 노동자의 생명권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몇만원 아끼려다 사람 죽는 곳

건설노동자 하동현씨(48)는 전선 지중화(땅속에 전선을 설치하는 작업) 일을 하며 수많은 소규모 건설현장을 다녔다. 안전보건관리자나 위험성평가, 안전교육 등 안전조치가 제대로 이뤄지는 현장은 거의 없었다. 불법 다단계 하도급이 판치는 건설현장에서 안전은 줄여야 할 ‘비용’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고 하씨는 말했다.

하씨는 “(불법 하도급 업자들은) 안전관리비도 본인들이 가져가야 할 비용으로 인식해 횡령하곤 한다”고 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 충남건설지부장을 맡은 하씨도 현장을 다닐 때 안전화 같은 안전장구조차 거의 전부 직접 샀다. 하씨는 “누군가는 그 비용(안전장구 구입비)을 올려서 자기가 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제조업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소규모·영세 제조업체가 밀집한 경기 반월·시화공단에서 노동안전 활동을 하는 정현철 안산노동안전센터장은 “후진하는 지게차에 경고음 장치가 없어 치여 죽거나, 낡은 슬링벨트(물건을 들어 올리는 벨트)를 교체하지 않아 물건이 떨어져 숨지는 등 막을 수 있었던 사고들이 많다”며 “고작 몇만원짜리 슬링벨트를 교체하지 않아 사람이 죽고 있다”고 했다.

사고보다 생산 차질 신경쓰는 원청

대기업 하청이 대부분인 소규모 제조업체 생태계에서 원·하청 구조도 사고를 키운다. 30인 규모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김현제씨(34)는 차량으로 현대차 공장 생산라인에 자재를 운반하는 일을 한다. 협소한 공간에서 운행하다 보니 자재를 들이받거나 작업자들이 다치는 일도 잦다. 김씨는 “만약 그런 사고로 라인이 멈추면 원청은 책임을 묻는다”면서 “(원청은) 왜 사고가 났는지는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장을 맡은 김씨는 “하청업체는 이윤을 더 많이 추구해야 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업무강도가 높고 운행 횟수가 많아지니 사고율이 높아진다”며 “반면 하청업체는 노동환경 개선과 관련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다단계 하도급이 일상인 건설현장도 마찬가지다. 하씨는 “건설현장은 수백억원 규모 현장도 분리 발주해 50억원 미만으로 만들고, 다시 무자격 업자에게 재하도급이 간다”며 “원청에도 책임을 지우는 중대재해법이 적용돼야 공사만 수주하고 어떤 책임도 안 지는 시공사가 최소한의 책임을 지고, 안전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하고 긴장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여당은 ‘소규모·영세 현장은 중대재해법 적용 준비가 안 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 3월 고용노동부 발주로 한국안전학회가 50인 미만 1442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법상 의무를 이미 갖췄거나 준비 중이다’란 응답이 82%에 달했다. 법 적용 전 필요한 조치(복수응답)로는 ‘재정 지원’(36%)이 가장 많이 꼽혔고 다음은 ‘컨설팅’(25%)이었다. ‘적용 유예’는 20%로 비교적 적었다.

“모든 노동자에게 보호받을 권리”

노동자들은 소규모·영세 사업장이라는 이유로 생명 안전의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하씨는 “이미 3년의 유예를 줬는데, 이를 다시 유예한다는 건 중소 규모 사업장 노동자 보호 의무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법이 시행돼야 원청이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면서 “하청업체 입장에서도 내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다치거나 죽지 않게 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정현철 센터장은 “중대재해법은 산업안전보건법의 핵심 중 기본적인 것들을 가져온 것으로, 중대재해법을 유예해달라는 것은 지금까지 산안법도 어기고 있었다는 자기 고백”이라며 “회사가 작다고 품질경영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않나. 사업을 하려면 당연히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도 우선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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