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전체 쑥대밭’ 망연자실

2002.09.01 18:15

연 3일 900㎜에 가까운 사상 최악의 폭우가 쏟아진 강릉 시내 일대는 전쟁터를 방불케할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버렸다.

물이 빠지기 시작한 1일 강릉도심 전역은 정전과 전화불통, 교통두절 사태가 이어져 육지속의 섬으로 변했다. 도로는 곳곳이 파여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고, 도로주변에는 흙에 처박힌 차량들과 떠내려온 쓰레기와 가재도구들이 뒹굴고 있었다.

주민들은 비가 조금씩 그치면서 방안까지 들이닥친 진흙을 쓸어내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수돗물까지 나오지 않아 청소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손엔 물통을 들고, 다른 한손으론 세살배기 아들의 손을 잡고 강릉시청에 물을 받으러 온 한 주부는 “그렇게 많은 비가 쏟아져 내렸는데 정작 한모금 마실 물이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강원 영동지역 최대 저수량을 자랑하던 장현저수지가 붕괴되면서 20여채의 가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강릉시 장현동 43통3반 주민들은 비통함속에 9월의 첫 아침을 맞았다.

“세금 내려고 전날 찾아와 장롱속에 넣어 두었던 돈도, 아이들이 어려운 형편에 오래오래 살라며 두손에 꼭 쥐어주던 금가락지도 하나 건지지 못했어”

허리가 잘려나간 마을앞 장현교 입구에 동네 노인들과 모여 앉아 있던 이재우 할머니(86)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만 하다며 온몸을 떨었다.

이할머니를 위로하던 이웃 아낙네들은 1996년 잠수함을 타고 온 무장공비가 이 지역을 활보할 때보다 더 무서웠다며 지난 밤의 악몽을 떠올리며 몸서리 쳤다.

장현동 동장을 지냈다는 황서근씨(73)는 “장현저수지가 붕괴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을 듣고 속옷 한벌 챙기지 못한 채 다리가 끊기기 직전 가까스로 마을을 빠져 나왔다”며 “칠십평생 이런 물난리는 처음 겪는다”고 울먹였다.

지난달 31일 밤 12시 강릉주민들의 식수원인 오봉댐이 범람위기에 몰리면서 도심전역에 긴급대피령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주민들은 장대비속에서 거의 맨몸으로 고지대로 피신해야 했다.

주민들은 이런 급박한 상황속에서도 산사태로 무너져내린 집에서 중상을 입고 신음중이던 최종대씨를 극적으로 구해 시내 병원까지 이송하는 감동을 연출하기도 했다.

강릉시의 한 공무원은 “얼마나 상황이 급박했으면 10여대 차량이 매몰된 35번 국도 산사태 사고를 진두지휘하던 강원지방경찰청장이 잇따라 유실되는 도로를 피해 로프를 타고 강줄기를 건너는 일까지 벌어졌겠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영동고속도로를 비롯해 백봉령, 대관령 옛길 등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도로 곳곳도 사상 최악의 폭우로 산사태 위험을 내포한 채 운전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새벽 2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마을 전체가 삽시간에 물바다로 변하는 비참한 장면을 목격하면서 몸서리치던 최종철씨(46). 친정집이 걱정돼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등에 업고 장현동으로 발길을 재촉했다는 30대부부. 강릉 시내에 살고 있는 주민 20만여명은 이렇게 공포의 밤을 보내야 했다.

강릉 시민들에게는 3일동안 내린 900㎜의 비만큼이나 많은 안타까운 눈물이 고여 있는 듯 보였다.

제15호 태풍 ‘루사’가 동해안 최대 관광지인 강릉지역에 남긴 상처는 쉽게 치유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컸다.

〈강릉/최승현기자 cshdmz@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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