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화국 ‘개발 야사’

2003.09.01 14:51

지금의 서울특별시를 만들어낸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는 이 물음에 대해 차근차근 대답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196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의 서울시 개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만큼 서울시 개발에 제 3-4공화국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서울 개발사에서 가장 카리스마 강한 족적을 남긴 사람은 김현옥 전 시장이다. 이 책에서 그는 1395년 6월 13일(음력) 성석린이 초대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에 임명된 이후 서울이 배출한 1,425명의 시장 중 가장 출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군 출신인 그가 서울시장 자리에 취임한 때는 1966년 4월 4일. 물자도 돈도 부족하던 시대였다.

도심 재개발로 부족한 재원 조달

그는 이런 약점을 공격적인 정책으로 극복했다. 김 전 시장은 취임하자마자 부산시장 재임 시절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을 과시라도 하듯 서울 시내를 파헤쳤다. 이 때문에 건설자재 파동까지 발생할 정도였다. 여의도를 건설할 때에는 443명의 주민을 쫓아내고 밤섬을 폭파, 자재를 얻어냈다. 그의 '무대뽀'성은 서울시청 옆 태평로를 넓히면서 덕수궁 담을 헐어 뒤로 물리고 대한문까지 10m 뒤로 물러나게 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서울공화국 ‘개발 야사’

김 전 시장은 일에 ‘미쳤다’. 다만 재임 4년간 미쳤던 대상이 달랐다. 1966년에는 교통소통에 주력해 세종로-명동의 2개 지하도 공사를 비롯해 수많은 지하도와 육교를 건설했고 도로 확장과 개설에 매진했다.

이와 같은 공사로 인해 서울시 금고가 바닥나자 그는 민자유치를 통해 사업을 추진했다. 1967년 세운상가-파고다아케이드-낙원상가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이듬해 여의도 개발로도 이어진다. 여의도에 대규모 택지를 조성, 매각해 예산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공사는 1968년 6월 1일 끝났지만 도심과 연결 통로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여의도 개발은 1970년 서울대교(마포대교)가 준공될 때까지 미뤄졌다.

그 사이 김 전 시장은 경기 광주에 대단지를 조성, 도심의 판잣집 거주자를 집단 이주시키겠다는 '광주(현 성남)대단지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400여 동에 달하는 시민아파트를 건설했다. 서울 요새화계획을 내걸고 남산 1-2호 터널을 뚫은 것도 이때였다. 그는 결국 1970년 4월 8일 시민아파트 한 동이 무너지면서 옷을 벗게 된다.

미쳤다는 말이 정확할 정도로 그는 새벽부터 밤까지, 주말도 없이 일했다. 기공식과 개통식 등 행사가 하루 걸러 한 번씩 진행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직접 눈에 드러나는 것에만 치중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그야말로 '전시행정'인 것이다. 그는 대통령이 행차하는 길에 어김없이 공사모를 쓰고 나타났다고 한다.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워커힐호텔에 가기 쉽게 하기 위해 건설했다고 할 정도였다.

1970년 김현옥 전 시장의 뒤를 이어 시장에 부임한 이는 양택식 전 시장이다. 행정관료 출신인 양 전 시장도 김 전 시장만큼 일을 많이 했다. 그에게도 역시 주말이란 없었다. 그는 김 전 시장과 달리 사업에 대한 결심을 하기 전 참모들과 회의를 거듭했고 결심이 서더라도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의 시정은 앞뒤 시장이었던 김 전 시장과 구자춘 전 시장에 가려졌고 별명 역시 ‘두더지 시장’이었다.

잠실 개발 단초는 광주 대단지계획

양 전 시장은 김 전 시장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이어받았다. 안전성이 의심되는 400여 동의 시민아파트와 반쯤 뚫린 남산 1-2호 터널, 반쯤 건설된 한강강변도로, 허허벌판인 여의도, 착수된 지 얼마되지 않은 강남과 광주대단지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더 큰 것은 서울시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김 전 시장은 재산매각-민자유치-은행빚 등의 방법을 통해 '곡예사와 같은 재정 운영'을 해냈지만 양 전 시장에 이르자 더 이상 곡예는 불가능해졌다. 심지어 서울시 직원의 봉급마저 지급하지 못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 정도였다. 재정이 바닥난 것은 여의도 건설에 막대한 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서울공화국 ‘개발 야사’

양 전 시장은 여의도에서 서울시 재정을 살려냈다. 여의도윤중제 건설이 끝난 직후의 여의도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 땅은 팔리지 않고 입주하려고 하는 이도 없었다. 여기에 양 전 시장은 아파트를 지었다. 여의도시범아파트가 성공적으로 입주를 마치자 민간업체가 앞다투어 뛰어들어 대규모 아파트군이 만들어졌다. 이어 큰 시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서울시는 1972년까지 29억5천만원의 순수익을 올렸다. 이것이 빈사 상태의 서울시 재정을 살렸다. 양 전 시장은 1971년 여기서 얻은 10억원을 가지고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할 수 있었다.

광주대단지사업 마무리도 간단찮은 숙제였다. 조성된 단지에는 1969년부터 입주민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나 서울과 동떨어진 황량한 곳이라 이주민의 불만이 많았다. 이곳과 서울을 연결하기 위해 잠실섬과 육지의 연결, 잠실대교 건설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 잠실 개발의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양 전 시장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시장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4월 대한주택공사 사장으로 부임해 잠실지구 주공아파트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양 전 시장은 강남 개발도 촉진했다. 직접적인 이유는 북한의 침공에 대비, 강북에 몰려 있는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표면적인 이유라면 실제적인 이유는 김현옥 전 시장 때 서울시가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들인 대규모의 땅이 강남 일대라는 점이다.

양 전 시장은 1970년 11월 5일 특별기자회견을 하고 강남개발계획을 발표했고 이 발표는 강남땅 매각에 큰 도움이 됐다. 1971년 1월부터 매각에 들어간 강남땅은 5월 말쯤 전부 처분됐다. 땅은 팔렸으나 논밭투성이였던 강남을 서울시가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양 전 시장은 공무원아파트와 시영주택단지, 시내버스 노선을 만들어 강남을 개척했다. 강남은 양 전 시장의 뒤를 이은 구자춘 전 시장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인해 지금과 같은 틀을 갖추게 된다.

구자춘 전 시장의 별명은 '황야의 무법자'이다. 군 출신이었던 그는 저돌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김 전 시장만큼 예리하지는 않았지만 배짱이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풍부해진 시 예산이라는 든든한 후원병이 있었다. 김 전 시장의 마구잡이식 사업으로 서울시 살림은 빈사 상태에 놓였고 양 전 시장은 이를 여의도 개발을 통해 극복했다. 구 전 시장이 부임했을 때인 1974년에는 땅값과 집값의 상승 등으로 인해 세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대규모 사업이 가능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지하철 2호선 및 각종 도로의 신설과 확충을 이뤄냈다. 자금상의 여유 덕택인지 구 전 시장은 김 전 시장이나 양 전 시장과 달리 주말을 여유롭게 보냈다.

구 전 시장은 3핵도심 추진에 공력을 집중했다. 당시 서울에는 구도심과 여의도라는 신도심이 있었다. 3핵도심 중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강남이었다. 그는 강남 개발에 뛰어든다. 이는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이라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뜻과도 맞아, 그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서울공화국 ‘개발 야사’

그 중 하나가 바로 지하철 2호선 순환선 계획이다. 원래 계획된 지하철 2호선은 왕십리-을지로-마포-여의도-영등포였다. 구 전 시장은 이를 혼자서 변경, 지금의 지하철 2호선으로 바꿨다. 순환선은 당시로서는 무리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그는 특유의 배짱으로 이를 극복, 1975년 3월 지하철 2호선 계획을 발표했고 1978년에 착공했다. 지하철 2호선의 건설은 구 전 시장의 의도대로 인구의 분산 효과를 가져왔다. 착공되기 전 강북과 강남의 인구 비율은 65 대 35였지만 완공 뒤인 1985년에는 54 대 46으로 변경됐다. 또한 건물의 고층화와 대형화를 불러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구 전 시장은 강남에 고속버스터미널도 만들었다. 당시 고속버스회사는 강북에 각각 터미널을 운영하고 있어 교통 혼잡을 야기했다. 그는 고속버스터미널을 하나로 통합하기로 하고 강남에 고속버스터미널을 건설해 버스업자를 이곳에 유치했다. '사업자격박탈'이라는 서슬퍼런 명분에 대항할 업체는 없었기에 그의 계획은 성공한다. 구 전 시장은 이곳과 강북의 연결을 원활히 하기 위해 김 전 시장 시절 건설됐던 한남대교와 버스터미널, 서초동을 연결하는 대로와 잠수교, 남산 3호 터널을 건설했다.

인구 분산 위해 지하철 2호선 변경

그는 당시 강북에 집중돼 있던 명문고교도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명문이었던 경기고가 동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3년 강남으로 이전했지만 다른 학교는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구 전 시장은 1978년 대통령 연두순시에 '학교의 강남 이전'을 집어넣어 명분만 기다리고 있던 학교의 강남 이전을 도왔다.

‘황야의 무법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구 전 시장도 김 전 시장 못지않게 저돌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영등포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성산대로 건설이다. 연세대를 거쳐 금화산에 터널을 뚫고 사직터널과 연결하는 고가도로 설계를 하다보니 사적 제32호 독립문이 문제가 됐다. 건설해놓고 보니 독립문 바로 위를 고가도로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구 전 시장은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며 국보 제1호 남대문과 보물 제1호 동대문에 미치게 될 진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기를 늦춰가며 비용과 기술력을 쏟았던 양 전 시장과 달리 이전을 강행했다. 다만 문화재위원회와 협의를 통해 반대의견을 굴복시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서울시의 개발은 이 세 사람을 거치며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종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가 그의 책에서 김-양-구 전 시장을 출중한 시장으로 선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재용 (뉴스메이커) 기자 politika9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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