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 꿈 접고 떠난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무엇이 젊은 그를 좌절케 했나

2014.03.12 13:43 입력 2014.03.12 14:27 수정

“한 해 동안 아이는 키가 9.4cm 컸고, 방과 후 학교 어딘가에서 수업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가방 한 번, 실내화 주머니를 두 번 잃어버렸다 다시 찾았고, 꿈을 기관사에서 딱지장사로 바꿨다…”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35)가 지난달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아이가 1학년을 무사히 마쳤다”로 시작하는 글이다.

‘싱글맘’으로 홀로 아들을 키워오던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남긴 채 지난 8일 오전 서울 사당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다. 그의 아들은 이제 겨우 아홉살. 자신 역시 서른 다섯살에 불과했던 젊은 진보 정치인은 예고도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경찰 조사 결과 박 부대표는 우울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그는 무엇 때문에 우울해야 했을까.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걸개그림. 노동당  제공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걸개그림. 노동당 제공

박 부대표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왜 우울했는지는 그의 과거를 통해 유추하는 방법 밖에 없다.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를 꿈꿨던 그는 학원 강사를 하면서 89통의 이력서를 쓴 뒤에야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가 됐다. 하지만 정규직 교사가 아닌 기간제 교사였다. 계약한 지 6개월 만에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계약기간은 1년이었지만 기간제 교사였던 그는 이 기간을 채울 수 없었다.

정규직 여교사들은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 ‘모성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지만 기간제 교사들이 이런 권리를 누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임신한 기간제 교사가 고민한 것은 오로지 ‘어떻게 해야 퇴사를 피할 수 있을까’ 뿐이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있지만 그의 해고를 막지 못했다. 박 부대표는 당시 전교조도 전체 교사 중 15%에 해당하는 기간제 교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전교조 교사가 돼서 참교육을 실천하고, 조합의 일원으로 운동도 하고 싶었던 박 부대표는 교사의 꿈을 접고 그렇게 학교를 나왔다.

그는 생활을 위해 다시 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아이가 생겼으니 다른 곳으로 눈 돌릴 여유도 없었다. 학원 강사를 하며 돈도 제법 모았지만, 마흔이 넘어서까지 학원 강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진보정당에 희망을 걸고 2008년 진보신당 공채에 지원해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8대 총선 동작을 김종철 후보 수행비서, 언론국장, 대변인을 거쳐 19대 총선에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로 활동했다. 지난해 2월에는 노동당(전 진보신당) 부대표로 당선돼 대변인까지 겸직했다.

그러나 진보정당 당직자로 생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박 부대표는 지난해 11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웬만한 전문직, 고소득직이 아닌 이상에야 아이를 키우면서 살기 어렵다. 진보 정치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진보정치 활동을 하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 바 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현재 노동당은 최저임금만 주고 있다”며 “학원 강사 시절 모아둔 돈을 조금씩 조금씩 뜯어서 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아이와 2층 침대를 쓰는 것도 가스비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발상”이라며 “어떻게든 한 방에서 자야 될 것 같아서”라고 하기도 했다.

노동당이 활동가들에게 최저임금밖에 줄 수 없는 이유는 한국의 정치 구조 때문이다. 현재 정당들에게 배분되는 국고보조금과 운영지원금의 경우 총액의 50%를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우선 나눠 갖는다. 나머지 50%는 양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의원 수 비례로 나눈다. 의원을 배출하지 못한 노동당은 국고보조금과 운영지원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노동당이 운영비를 기댈 수 있는 곳은 당비뿐이다. 그러나 당원이 많지 않은 노동당은 이마저도 큰 금액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한 진보정당 관계자는 “관변 단체들도 1년에 수억원의 국고보조금을 받고 있다”며 “의석수가 많아야 지원금도 더 많이 받는 ‘승자독식’ 구도인 현행 정치자금법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업무를 맡았던 언론도 진보정당에 무관심했다. 원외 정당이 된 노동당에 대한 기사를 써주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박 부대표가 지난 1월17일 대변인직을 사임하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글은 “지난 2년여의 대변인직을 마무리하며 언론인들께 한가지 간곡한 요청을 드린다”로 시작된다. 그는 “진보정치의 겨울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은 현재 노동당의 열악한 모습과 다르지 않다”며 “비록 지금은 작은 원외 정당이지만 노동당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작은 관심이라도 기울여주시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그의 한 지인은 블로그에서 “박 부대표가 진보신당 대변인 시절 전 국민에게 대출을 권하는 ‘김미영 팀장’ 수준으로 기자들에게 문자 폭탄을 돌렸다”고 전했다. 진보신당이란 이름이 단 한번이라도 언론에 더 언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가 택한 전략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세상이 변할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느렸다. 그러는 사이 박 부대표에게 우울증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늘 유쾌하고 화통했기에 주위 사람들은 그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지 못했다.

진보신당 시절 박 부대표와 활동했던 정의당 관계자 ㄱ씨는 지난 10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행복해야 운동도 실천도 할 수 있다”며 “진보정치가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우울증을 앓거나 이혼한 사람도 많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박 부대표를 옆에서 좀더 살펴봐주지 못해 무엇보다 미안한 심정”이라며 “나보다 박 부대표와 더 가까웠던 지인들 중에 이런 생각들로 자신을 자책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텐데 이 점도 걱정”이라고 했다. 실제 박 부대표의 한 지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지난번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들다고 했을 때 좀더 관심있게 봤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ㄱ씨는 박 부대표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 “희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희망이 있으면 현실이 힘들어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며 “현재 노동당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이 많고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불행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영결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노동당 제공

지난 10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영결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노동당 제공

동지를 잃어버린 노동당 역시 분위기가 우울했다. 박 부대표와 진보신당 시절부터 함께 한 이봉화 노동당 부대표는 11일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박 부대표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불안한 사회에서 우리 모두 힘겹게 살아가며 우울감을 겪고 있는게 아니냐”며 “그의 죽음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기 조심스럽다”고 밝혔다. 다만 “그동안 진보 진영이 계파 등으로 분열을 겪었지만 함께 운동해왔던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따뜻하게 장례를 치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부대표의 영결식은 지난 10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치러졌다. 이용길 노동당 대표는 이날 추도사에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그대를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가 그대에게 고통의 짐을 함께 짊어지도록 요구했습니다. 동지는 기꺼이 그 짐을 함께 짊어졌고, 늘 웃는 얼굴로 오히려 주위 동지들을 챙겼습니다. 그 웃음 뒤에서 동지가 어떤 아픔을 인내해야 했는지, 그 아픔의 깊이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미처 가늠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노동당’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포털사이트에서 ‘노동당’이 인기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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