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③우리도 청년인가요?]“헬조선이 뭐예요? 우린 그런 거 신경쓸 여유도 없어요”

2016.01.11 06:00 입력 2016.02.02 18:24 수정

“헬, 뭐요? 헬조선요? 그게 뭔데요?” 조성빈씨(19·가명)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지방 도시의 발광다이오드(LED) 전구회사에 취업했다.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120만원을 번다. 일이 끝나고 기숙사에 오면 녹초가 돼 잠든다. 스마트폰으로 통화·문자메시지나 노래만 들을 뿐 뉴스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지 않는다는 조씨는 현실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다고 했다. ‘헬조선’은 지옥을 뜻하는 ‘헬(hell)’과 조선을 합쳐 살기 힘든 현실을 빗댄 신조어다. 지옥 같은 한국을 떠난다는 ‘탈조선’도 퍼져갔다. 조씨는 그러나 이 말도, 저 말도 모른다고 했다.

전문대를 다니다 잠시 사무보조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23세 여성이 지난해 말 밤늦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집으로 가는 육교 위 달빛이 길을 비춰주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전문대를 다니다 잠시 사무보조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23세 여성이 지난해 말 밤늦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집으로 가는 육교 위 달빛이 길을 비춰주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지난해 3분기 청년(15~29세) 실업자수에서 고교·전문대 졸업자(24만1000명)는 4년제 대학 출신(11만4000명)의 2배를 넘었다. 하지만 청년 문제는 줄곧 4년제 인(in)서울 대학 졸업자나 취업준비생을 중심으로 다뤄졌다. ‘청년 문제’에서 비켜나 있는 ‘청년’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고졸 얘기는 아무도 안 들어요”

밴드공연 기획을 하는 임희애씨(23)는 “청년요? 저는 아니에요”라며 고개를 저었다. 고졸 검정고시 출신인 임씨는 구청에 취업교육을 신청하러 갔다가 낙담했다. 고졸은 지원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들을 수 있는 수업도 강사는 수강생을 대졸자로 상정하고 진행했다. 학번, 전공, 캠퍼스 이야기가 나왔고 임씨는 그럴 때마다 소외감을 느꼈다. 임씨는 “뉴스에 나오는 대기업 일자리 감소니 하는 문제에 전혀 공감하기 어렵다”며 “인턴이나 자기소개서는 저하고는 먼 얘긴데 허구한 날 이런 얘기만 나온다”고 했다. 그는 “요새 청년들은 주변에서 힘들다고 위로해주고 그들의 문제를 대변해줄 사람이 있는 것 아니냐”며 “고졸인 내 문제를 대변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교 졸업 후 수도권에서 여러 공장을 떠돌고 있다는 강윤철씨(29·가명)도 임씨와 같은 생각이다. 강씨는 “언론에서는 전문대, 고졸 생산직 청년 얘기를 별로 다루지 않는다”며 “삼성에 가려고 스펙 쌓는 사람들 얘기만 많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경기 성남시 ‘일하는학교’ 이정현 교사는 “대학이나 취업의 틀로만 규정되는 청년 이슈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6~11월 성남에서 생계형 알바를 하고 있는 고졸 이하 청년 140여명을 면접조사했다. 이 교사는 “중소기업 취업도 어려운 청년이 많다”며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만 만나다보니 삶의 고통도 무뎌진 채 고된 하루를 버텨가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7~8월 경기 수원시 청년들을 만나본 박승하 ‘노동하는청년 준비위원회’ 대표도 “고졸·전문대졸 청년의 상당수가 헬조선, 탈조선 같은 말을 모르고 있었다”며 “다들 일하기 바빠서 뉴스를 보거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할 여유가 없다”고 했다. 두 활동가는 “고졸·전문대졸 청년 대부분이 자신의 말을 하고 싶어했다”고 입을 모았다.

■단기직 떠도는 ‘일회용 청년’

“취업난요? 이 동네 파견업체에 가면 남자는 3일이면 취업이 가능해요.” 지난달 15일 오후 7시쯤 경기 안산시에서 만난 최성필씨(28·가명)는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다고 했다. 저임금과 긴 노동시간만 감수하면 취업은 쉽다는 것이다. 고교 졸업 후 여기저기 떠돌던 그가 안산의 파견업체를 찾은 것은 3년 전이다. 일하겠다고 등록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면접 신청이 오고 바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침에 파견업체에 가면 차를 태워서 반도체부품 업체로 데려다줬다. 인쇄회로기판(PCB)에 도금하는 일이었지만, 교육 없이 바로 라인에 투입됐다. 최씨는 “파견업체에서 온 사람은 어차피 나갈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소모품처럼 다룬다”며 “고등학교 나오고 9년째지만 미래 계획을 세우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 청년’의 삶이었다.

라정호씨(26·가명)도 취업 사다리의 맨 밑을 받치고 있는 ‘고졸 청년’이다. 학교를 나와 일한 곳만 다섯 군데가 넘는다. 모두 급여는 너무 적고 노동시간이 길어 옮기게 됐다. 지금 일하는 백화점도 정규직은 아니다. 하루 12시간 뛰어다니고 월 145만원을 받는다. 라씨는 “명찰에는 ○○백화점이라고 써 있지만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다”며 “오래 일하거나 잘하면 정규직 전환을 해준다고는 하는데, 글쎄, 믿음이 가지 않아 다른 곳도 찾아보고 있다”고 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현재의 일자리 유지 비율을 조사한 결과 대졸 청년은 83.2%, 전문대졸은 75.5%, 고졸은 59.9%로 나타났다. 고졸자 2명 중 1명은 5년 반 사이 경험한 직장이 4개가 넘었다. 이동이 잦지만 좋은 직장으로 연결되지 않는 ‘쳇바퀴 노동’이다.

■“서울 밖에도 청년이 살고 있다”

경남에서 대학을 다니는 하인혜씨(26·가명)는 “교통이 발달해도 물리적 거리가 있다보니 서울에 몰려 있는 대기업이나 국회 인턴 등의 기회를 잡기 어렵다”며 “취업 준비를 하려고 해도 서울이 아니면 정보를 얻거나 학원 다니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패배감이나 열등감에 자포자기하는 친구들도 많다고 했다. 그는 “지역대학 나와서 연봉 4000만원 받는다고 하면 못 믿는 분들이 있다”며 “지역 청년은 청년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부산에서는 지역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계간지 ‘지잡’이 창간됐다. 편집장 김영욱씨(33)는 “기성 언론은 지역 청년들의 고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관심이 없다. 대부분 쟤네들은 소외감을 느낄 거야, 좌절했을 거야, 이렇게 예단하고 접근한다. 대학생들이 만든 독립언론도 수도권 중심”이라며 “결국 청년 문제를 다뤄도 서울의 시각에서 보게 될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 밖에서, 관심 밖에서 살고 있는 더 많은 청년들이 묻는다. “우리도 청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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