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은 ‘분권’…지방은 죽어가는데

2018.02.13 06:00

내 삶을 바꾸는 지방분권

돈 틀어쥔 정부 ‘무늬만 권한이양’…재정권 조항 손질 필요

박근혜 정부는 야당 출신 지방자치단체장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원순 서울시장이 추진한 청년수당 사업이다. 2016년 8월5일 서울시가 현수막을 걸어 청년수당 정책에 직권취소 결정을 내린 정부를 비판하자(사진 왼쪽), 같은 달 14일 보건복지부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외벽에 서울시 입장을 반박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연합뉴스·정지윤 기자

박근혜 정부는 야당 출신 지방자치단체장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원순 서울시장이 추진한 청년수당 사업이다. 2016년 8월5일 서울시가 현수막을 걸어 청년수당 정책에 직권취소 결정을 내린 정부를 비판하자(사진 왼쪽), 같은 달 14일 보건복지부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외벽에 서울시 입장을 반박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연합뉴스·정지윤 기자

한국은 수도권 중심의 압축 성장을 해왔다. 국토의 12%인 수도권에 인구의 50%, 상장회사의 72%, 전국 20대 대학의 80%, 정부투자기관의 89%, 예금의 70%가 몰려 있다. 서울이 발전하면 지방도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서울에 돈과 사람이 몰리고, 수도권과 지방 간 양극화가 심해지자 역대 정부마다 지방분권과 지역 균형 발전을 내세웠다. 노무현 정부는 수도 이전을 추진했지만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백지화됐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도 ‘지방분권 촉진에 관한 특별법’ 등을 마련했지만 각종 수도권 규제를 풀면서 지역 발전은 오히려 후퇴했다. 한국은행과 고용정보원 등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전국 읍·면·동 가운데 1383곳(40%)이 30년 내 소멸할 것으로 추정된다.

문재인 정부의 5대 국정 목표 중 하나가 ‘분권발전-고르게 발전하는 지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방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방분권제”를 언급했다. 개헌으로 지방분권 국가를 선언하고 재정·조직·입법 등에서 분권을 헌법에 새겨넣겠다는 것이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지방의 재정 자립도를 올리는 일이다. 문 대통령은 “현재 8 대 2 수준인 국세와 지방세 비율이 7 대 3을 거쳐 6 대 4 수준까지 개선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원회도 헌법안에 지방정부의 재정권 조항을 마련했다.

올해는 지방선거의 해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오는 6월13일 실시된다. 하지만 진정한 지방자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국가기관 간 수평적 분권과 더불어 중앙·지방정부 간 합리적 분권을 통해 각 정부가 핵심 역량에 집중할 수 있도록 틀이 갖춰져야 한다. 헌법에 ‘지방분권’을 새겨넣은 것은 시작일 뿐이다. 어떤 지방분권이 한국 사회에 맞는 모델인지, 지역마다 자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한지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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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로 뽑힌 지방자치단체장이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복지 정책을 펼치려고 한다. 그런데 중앙정부가 협의 없이 밀어붙였다며 중단하라고 주장한다면?

2015년 11월 서울시가 미취업 청년들에게 월 50만원을 지원하는 청년수당 사업을 발표했다. 보건복지부는 “정부와 협의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주장했고 서울시는 “협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충돌했다. ‘사회보장제도 신설·변경 협의제도 협의 운용지침’은 중앙부처나 지자체가 사회보장제도를 신설·변경할 경우 복지부 장관과 협의하게 했다. 복지부는 청년수당을 사회보장사업으로 본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다수인 서울시의회는 청년수당 예산을 의결했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2016년 1월 복지부는 대법원에 서울시 청년수당에 대해 제소했다. 이후 서울시와 복지부는 청년수당에 관해 협의했지만 복지부는 부동의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부동의를 동의 못한다”는 입장을 페이스북에 표명하며 갈등은 심각해졌다. 복지부가 재차 부동의 의견을 통보했지만 서울시는 8월 청년수당 시범사업 대상자 2831명에게 첫 수당을 지급했다. 복지부는 다시 청년수당 직권취소 결정을 내렸고 이에 서울시도 이 직권취소가 부당하다며 대법원에 제소했다. 극단을 오가던 양측은 지난해 4월 복지부가 서울시에 청년수당 수정안을 수용하겠다고 통보한 후 본격 시행됐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정책을 중앙정부가 반대하는 상황은 박근혜 정부 내내 반복됐다. 김남희 참여연대 복지조세팀장은 “지자체가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복지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많고 중앙정부의 복지서비스로 부족한 측면을 지자체가 채운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김 팀장은 “중앙정부가 지자체의 정책을 막으려고 하거나 중앙정부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재정 책임은 지자체에 떠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 생색은 중앙에서 돈은 지방에서

정책시행과 재원조달의 불일치는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을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다. 김상곤 교육감 시절 경기도교육청이 시작한 무상급식의 정책 주체는 교육청이고 필요한 사업비도 지방재정과 지방교육재정으로 충당했다. 중앙정부 예산은 선거로 뽑힌 교육감들의 정책에 안 들어간다. 이명박 정부가 시작해 박근혜 정부가 확대한 무상보육 정책은 다르다. 중앙정부가 결정하고 지방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구조다. 재정의 절반 이상을 지자체와 교육청이 부담했다. 국고보조사업에서는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일정 비율로 필요한 재정을 분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2012년부터 중앙정부와 지자체·교육청이 해마다 ‘예산전쟁’을 벌였다. 중앙정부가 무상보육 예산을 더 부담하기를 기대했던 지자체·교육청은 해마다 항의했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강행했고 지자체·교육청이 반발, 이후 국회가 나서면서 중앙정부가 조금 양보하는 식으로 갈등이 무마됐다. 4년 넘게 지속되던 이 갈등은 2017년 정권 교체 후 문재인 대통령이 전부 중앙정부가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끝이 났다.

지방재정은 열악해지고 있다. 지자체가 필요한 자금을 얼마나 자체 조달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재정자립도(일반회계 세입 중 자체 재원이 차지하는 비율)는 2003년 56.3%에서 2017년 53.7%로 떨어졌다. 재정자주도(지자체가 재량대로 쓸 수 있는 일반 재원의 비중)도 2003년 84.9%에서 2017년 74.9%까지 떨어졌다.

자체사업 비중은 감소했지만 중앙정부에 의존하는 보조사업 비중은 증가했다. 2008년에는 지자체 총예산 중 자체사업 비중이 46.1%로 보조사업 비중 34.2%보다 높았지만 2013년 역전됐고 2016년에는 자체사업 비중이 40.1%, 보조사업 비중이 41.6%를 기록했다. 2015년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세입예산은 7 대 3이지만 세출예산은 5 대 5였다.

채연하 좋은예산센터 선임연구원은 “지방세 비중이 낮고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재원은 한정적이지만 세출은 점차 늘어나는 비대칭적인 구조에서 지자체는 중앙정부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방의 재량이 작아지면서 지방선거도 별다른 의미를 갖기 어렵다.

최승우 좋은예산센터 기획팀장은 “함평군의 경우 전체 예산 가운데 사회복지 지출이 80%를 넘고 여기에 전년도부터 이어지는 사업들도 있다”면서 “100억원 예산 가운데 지자체가 판단해 집행할 수 있는 예산은 전체의 5%에 불과하니 선거가 큰 영향이 없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재 8 대 2 수준인 국세와 지방세 비율이 7 대 3을 거쳐 6 대 4 수준까지 개선되도록 하겠다”고 밝혔고 지방정부가 예산과 사업결정권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남는다. 재정만 떼어주면 지방자치가 확대될까.

■ 자치 없는 분권, 주민들은 소외

전남도는 F1 대회 개최를 위해 경주장 건설비·대회 운영비·개최권료 등으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년간 총사업비 8752억원을 지출했지만 4년간 적자 1902억원이 났다. 사업비 중 지방채 발행액이 2848억원에 달해 앞으로 1482억원을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다. F1 대회 개최는 중단됐고 경주장 운영 수익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18억6000만원에 불과했다.

지난해 10월 경북 영주시 풍기인삼축제장 입구에는 인삼 모형의 조형물이 세워졌다. 5m 크기의 인삼 조형물에는 ‘인삼의 힘’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붙었고 아래쪽에 남성 성기 모양의 붉은색 물체가 매달렸다. 논란이 되자 조형물은 철거됐다. 서울 강남구에서도 조형물 논란이 있었다. 강남구는 2016년 4월 코엑스 앞에 가수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에 나오는 ‘말춤’ 안무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웠다. 높이 5.3m, 길이 8.3m의 대형 조형물에 4억원의 강남구 예산이 들었지만 흉물 논란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지역 축제는 대표적인 이벤트성 행정이다. 2014년 기준으로 큰 규모의 축제(광역시 축제예산 5억원 이상과 기초자치단체 3억원 이상)는 361개 정도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이틀 이상 개최하는 축제를 집계한 결과는 733개다.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이 소요되는 축제까지 모두 합하면 한 해 1만5000개 정도 된다. 문제는 대부분의 축제가 적자라는 사실이다.

<지방도시 살생부>를 쓴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며칠 동안의 반짝 축제가 성공적이라고 지역경제가 활성화되는 건 아니다”라고 썼다. 성공한 축제로 평가받는 전남 함평의 나비축제도 군에서는 연간 100억~200억원의 직간접 효과가 있다고 홍보하지만 축제를 시작한 1999년 이후 함평군 인구는 꾸준히 감소했다.

지방재정 낭비 사례는 열거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분권 논의는 중앙의 재정·조직·입법 등을 지방으로 넘기는 것에만 집중돼 있다. 그래서 지방의회를 강화하고 주민참여를 늘리지 않은 재정 분권은 무늬만 분권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지방분권은 중앙의 것을 지방에 나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방 안에서의 분권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면서 “그래서 중앙과 지방을 나누는 헌법과 법률 개정 외에도 지방 안의 권한 배분을 위한 법률과 조례 등을 동시에 정비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분권을 위해 국세와 지방세 비율을 6 대 4까지 나누겠다는 방안에 더해 어떻게 주민들을 위해 쓸 수 있게 제도로 보완할 것이냐는 논의가 필요하다. 배분받는 만큼 책임, 감시를 확대해야 하는 문제도 얘기해야 한다. 결국 지방의 민주주의 문제다. 지자체장과 지방의회 간 권한 배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 감시·견제할 수 있는 감사조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같이 논의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별취재팀 =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임아영·김경학·김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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