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은행도 변화시킨 블록체인, ‘금융 민주화’ 시대 연다

2019.01.22 22:08 입력 2019.01.22 22:46 수정

추크에서 취리히로 ‘변화 물결’

‘트러스트 스퀘어’ 공동설립자 안톤 골럽이 지난달 13일 취리히 트러스트 스퀘어 로비에서 교육용 컴퓨터 ‘라즈베리 파이’로 만든 비트코인 채굴기를 바라보고 있다.

‘트러스트 스퀘어’ 공동설립자 안톤 골럽이 지난달 13일 취리히 트러스트 스퀘어 로비에서 교육용 컴퓨터 ‘라즈베리 파이’로 만든 비트코인 채굴기를 바라보고 있다.

금융중심지 취리히도 추크에서 시작된 변화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다. 취리히역에서 취리히 호수로 이어지는 도로 ‘반호프슈트라세’는 은행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취리히 호수 근처 반호프슈트라세와 뵈르젠슈트라세(증권거래소 거리)가 만나는 지역에는 스위스 중앙은행이 있다. 이 일대는 과거 스위스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있던 지역이다. 스위스 중앙은행 맞은편에 회색빛이 도는 4층 건물에는 취리히판 ‘CV랩스’를 표방한 ‘트러스트 스퀘어(Trust Square)’가 들어서 있다. 직전까지 리히텐슈타인 은행인 ‘VP방크’가 있던 건물이다.

■ 금융중심지에 들어선 ‘블록체인 허브’

금융중심지인 반호프슈트라세
중앙은행 앞 블록체인 허브 ‘상징적’
가상통화 다루는 프라이빗 은행도

트러스트 스퀘어 공동설립자 안톤 골럽은 “금융중심지인 스위스의 반호프슈트라세에, 그것도 스위스 중앙은행 맞은편에 ‘블록체인 허브(Hub)’가 들어왔다는 건 매우 상징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3층에는 스마트폰 배터리 충전기처럼 생긴 작은 기계 20여대가 쉴 새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교육용 컴퓨터인 ‘라즈베리 파이’를 여러개 연결해 비트코인 채굴기를 만들었다. 같은 층에는 라즈베리 파이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한 채굴기를 만드는 세계 최대 채굴기 제조업체인 중국의 비트메인도 입주해 있다. 시그넘(SYGNUM), 네오(NEO), 컨센시스(ConsenSys) 등 40여개 회사가 들어서 있다. 직원 수가 300여명에 이른다.

골럽은 “이곳에는 큰 회사도 있고, 작은 회사도 있다. 금융회사도, 테크회사도 있다. 우리는 다양한 생태계를 만들고 있고, 강한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은행가들의 모임, 여성 블록체인 모임 같은 소모임도 활발히 활동한다. 며칠 전에는 테조스 설립자가 와서 그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일들을 CV랩스에서 배우고 있다. 그들은 많은 경험들이 있고 다양한 조언을 해준다. 그들은 놀라운 업적을 쌓았다. 우리에겐 매우 가치 있고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취리히 금융중심지 반호프슈트라세에 들어선 ‘트러스트 스퀘어’.

취리히 금융중심지 반호프슈트라세에 들어선 ‘트러스트 스퀘어’.

■ 가상통화 투자하는 은행

골럽은 가상통화거래소 리케(Lykke)의 공동설립자이자, 가상통화 자산관리회사인 ‘플로브텍(flovtec)’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인터넷이 모든 사람에게 정보의 민주화를 가져다줬다면, 블록체인은 금융의 민주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골럽은 6년 전까지 헤지펀드에서 일했다. 외환시장에서 초빈도거래를 하며 수익을 냈다.

“하루는 저희 아버지가 ‘돈을 좀 보내줄 수 있냐’고 하시길래 스위스프랑을 송금해드렸죠. 아버지는 그걸 달러로 바꿔 쓰셨는데 수수료가 8%나 되는 거예요. 규모가 큰 은행이 외환을 조달할 때 수수료로 얼마를 내는지 아세요? 0.01%예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던 거지?’ ”

블록체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거래를 중개하고 교환하는 이들은 항상 ‘중앙’에 있어요. 중앙에 있으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죠. 그런데 중앙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교환’을 어떻게 할지 스스로 결정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부터는 자유를 얻는 겁니다.”

당시 20대였던 골럽은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동료 리처드 올슨과 함께 리케를 설립했다. 리케에선 거래 수수료가 없다. “e메일을 보낼 때 수수료를 내야 한다면 아무도 안 하려 하겠죠. 위챗 메신저를 쓸 때 돈을 내야 한다면?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 돈을 내야 한다면? 아무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기본적인 서비스이거든요. 블록체인에서 기본적인 서비스는 바로 ‘거래’죠. 블록체인이 작동하는 유일한 길은 거래 수수료를 없애는 데 있어요.”

인터넷 검색 서비스가 무료이듯
블록체인의 기본 서비스는 ‘거래’
거래를 중개하는 ‘중앙’ 사라져
수수료 없는 ‘거래의 자유’ 가능

금융당국의 규제는 리케 같은 블록체인 기업에 ‘법적 안정성’을 확보해줬다. 핀마는 가상통화의 성격을 3가지로 규정했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가상통화는 ‘지급형 토큰(Payment Token)’, 블록체인 기반의 애플리케이션(앱)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싸이월드 도토리’ 같은 성격의 가상통화는 ‘이용권형 토큰(Utility Token)’, 주식처럼 향후 수익이 발생하면 배당을 받는 것은 ‘증권형 토큰(Asset Token)’으로 구분했다.

초기에는 비트코인 같은 지급형이 많았지만, 이더리움이 등장한 이후에는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일종의 ‘앱’을 만들어 올릴 수 있는 기능이 추가돼 이용권형 토큰 개발이 용이해졌다.

최근에는 증권형 토큰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증권형 토큰을 다루는 거래소는 증권업법이 적용돼 별도의 라이선스를 받아야 한다. 핀마의 가이드라인 덕분에 블록체인 사업체들은 어떤 사업을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명확히 알게 됐다. 다만 여전히 조심스럽고 보수적이다. 리케는 1년 전 증권형 토큰을 다루기 위해 라이선스를 신청했지만 여전히 승인이 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은행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많은 은행들이 자금 출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블록체인 기업의 계좌 개설을 거부한다. 이 때문에 블록체인 기업 상당수는 스위스 옆 작은 도시국가인 리히텐슈타인의 프릭(Frick)은행을 이용한다. 이에 지난해 9월 스위스 은행연합회는 ICO를 하지 않은 블록체인 기업은 다른 중소규모 기업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ICO를 진행한 블록체인 기업은 자금세탁방지(AML) 및 고객확인(KYC) 법을 엄격히 적용하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 국부펀드가 소유한 팔콘은행은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가상통화를 다루는 프라이빗 은행이다. 팔콘은행은 기존 고객을 대상으로 자산 일부를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가상통화 4종에 투자한다. 고객이 보유한 가상통화도 현금으로 교환해준다. 다만 자금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추적하는 고객확인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의심스러운 거래가 없고 블록체인상에서 거래를 많이 하지 않은 가상통화일수록 현금화가 쉽다. 채굴한 뒤 한 번도 거래하지 않은 비트코인은 쉽게 현금화가 가능하다.

팔콘은행은 가상통화 투자에 대해 고객에게 조언을 하지 않고 고객이 주문한 대로 따른다. 고객에게는 가상통화 스토리지(저장) 서비스를 제공하고 세금 문제 등 전반적인 자산관리 방안을 컨설팅해준다. 팔콘은행 관계자는 “다른 은행들이 움직이기 전에 선도적으로 나선다면 그만큼 이득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금융당국과 우리는 함께 일했고 그들은 우리가 적용한 방식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특히 자금세탁방지법, 고객확인법과 관련해서는 핀마를 상대로 많은 대화가 있었다. 다른 은행은 이제 그 어려운 프로세스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그만큼 더 앞서 있다”고 말했다.

■ “블록체인 기술에 미래 달렸다”

스위스식 프라이빗 뱅킹 비즈니스
블록체인으로 교체 필요성 대두

골럽은 “그동안 스위스의 비즈니스 모델은 프라이빗 뱅킹에 기반하고 있었다”며 “미국이 해외금융정보교환법(FATCA)을 통과시키면서 그 비즈니스 모델은 끝나버렸고, 정부도 그 모델을 블록체인으로 바꾸는 것에 스위스의 미래가 달렸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가상통화 가격은 하락세다. 크립토 밸리 기업들도 혹한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루스 대표는 “누군가는 ‘크래시(Crash·붕괴)’라고 하지만, 나는 ‘커렉션(Correction·정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이 가상통화에서 블록체인 기술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기술을 보도록 하는 매우 좋은 시기다. 낮은 수준의 기술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과거 ‘닷컴 버블’처럼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만 남을 거고, 그게 블록체인 업계의 과제”라고 했다.

골럽은 “가격이 오르고 내리는 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닷컴 버블 이후에 아마존 주식가격이 얼마나 내려갔는지 아나. 무려 93%였다. 만약 그들이 ‘가격이 떨어졌으니 그만두자’고 했다면 큰 기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가격은 하나의 측면일 뿐이다. 기업인으로서 자신의 ‘비전’이 뭔지 이해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가격이 오르든 내리든 비전을 이뤄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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