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일 ‘촛불 대 횃불’, 그들의 정치 언어

2019.05.01 00:18 입력 2019.05.01 00:22 수정

195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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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1일 ‘촛불 대 횃불’, 그들의 정치 언어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페이스북 갈무리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페이스북 갈무리

“국민을 위한 정의의 횃불을 듭시다. 독재 세력들이 든 ‘독재 촛불’에 맞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횃불’을 높이 듭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달 30일 새벽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입니다.

공직선거법 개정안·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검경 수사권 조정법안을 담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안이 통과되자 심경을 담은 글을 올린 것입니다. “2019년 4월30일 새벽, 저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십시오”라고 시작하는 글은 “좌파 세력들은 의회 쿠데타에 성공했습니다. 문재인 세력들은 독재를 위한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습니다”라고 상황을 분석합니다.

그런데 이런 황 대표의 글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제는 국민을 위한 정의의 ‘횃불’을 듭시다. 독재 세력들이 든 ‘독재 촛불’에 맞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횃불’을 높이 듭시다”라는 부분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 낸 ‘촛불’의 대항적 개념으로 ‘횃불’을 언급하는 방식입니다. 말 장난 같지만 정치 언어가 고도의 ‘은유성’을 갖춘 계산된 언어라는 점에서 가볍게 볼 것도 아닙니다.

사실, 한국의 정치권력은 ‘내 편, 네 편’의 구분짓기를 뜻하는 ‘프레임’을 잘 형성한 집단이 차지해 왔습니다. 이 프레임을 형성하기 위해 정치 언어인 ‘레토릭’이 이용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영국의 언어학자 조나단 차테리스 블랙은 정치인들이 대중들을 동원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 중 하나로 ‘언어적 연출’을 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치 언어에 대한 분석 중 여전히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입니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은 황 대표의 ‘횃불’을 설명하는데도 유용합니다.

신라대 임순미는 ‘정치리더의 레토릭에 나타난 가치프레임’이라는 논문에서 아레스토텔레스의 정치 언어 활용법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공동체의 통합을 유도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때 주로 어떤 대상의 미덕이나 악덕을 칭찬, 비난함으로써 공통의 가치를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동체의 규율을 깬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잘잘못을 법정에서 가릴 때’입니다. 세 번째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가 공동체에 이롭고 해로움을 논의할 때’입니다.

매주 토요일 광화문 일대에서 보수의 집결을 외치고 있는 황 대표는 ‘횃불’이라는 정치 언어를 첫 번째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황 대표가 상황을 한국형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 싸움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를 선명하게 보이기 위한 레토릭으로 ‘촛불’대 ‘횃불’의 대결을 연출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는 황 대표 스스로 “결국, 촛불은 국민을 위한 촛불이 아니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을 지키라는 촛불정신을 날치기하고 강탈하고 독점하였습니다. 폭력을 위한 촛불이었습니다. 야합을 위한 촛불이었습니다. 독재를 위한 촛불이었습니다”라고 한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황 대표가 언급하는 ‘촛불’은 정치세력간의 ‘프레임’ 전쟁에 이용되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촛불’의 시작은 정치 세력간의 다툼이 아닌 ‘국민’ 대 ‘반 민주적인 정부’의 대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이날’]5월1일 ‘촛불 대 횃불’, 그들의 정치 언어

10년 전 오늘, 경향신문은 ‘촛불 1년, 한국은 어디로’라는 기획 기사를 3개면에 걸쳐 실었습니다. ‘촛불의 성찰과 평과’, ‘촛불의 과제와 전망’, ‘종합토론’ 식으로 진행된 심포지엄을 기사화 한 것인데요. 해당 내용을 살펴보면 ‘촛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 기획 기사면의 제목은 ‘국민주권의 정치적 발현이 가장 큰 성과’입니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인 것은 정부의 행태에 대한 분노가 이끌어낸 자발적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국민주권의 발현이 정치인의 선동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말이기도 합니다.

당시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촛불은 그 동안의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축제 같은 ‘즐거운 혁명’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나아가 시위 현장 등에서 행사되어 온 운동권력조차 사라지고 시민 스스로 인터넷에서 운동을 조직화하고 자발적으로 시위를 주도해갔다는 점에서, 세계 민주주의 운동사에 길이 남을만하다”고 평했습니다.

박진섭 당시 생태지평 연구소 부소장은 “촛불은 먹거리·환경·삶의 질·권리 의식 등에 의한 참여였고 자유로운 참여였다”며 “그걸 너무 정치·사회경제학적으로 해석하면 무리수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심포지엄에 참가했던 전문가들은 ‘촛불’을 정치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이용하려 하는 문제에 대해 반복해서 지적합니다.

[오래 전 ‘이날’]5월1일 ‘촛불 대 횃불’, 그들의 정치 언어

이기호 당시 한신대 교수는 “(촛불시위는)다양한 주체들을 등장시켰다. 이 주체들은 누군가에 의해 조직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참여하는 개인이었다는 점에서, 조직을 강조하며 성장한 한국 사회운동의 전통에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졌다”며 “거시적 담론과 틀에서 제기됐던 평화운동을 미시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구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합니다.

당시 함께하는시민행동 오관영 사무처장은 지적은 날카롭습니다. “권력에 대한 전선을 만들고 싸우는 운동만 해왔던 지금의 시민활동가들이 빨리 떠나주는 게 시민운동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얘길 듣고 충격을 받았다”며 “새로운 세대인 촛불의 등장 이후 우리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10년 전, 토론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촛불’을 ‘정치 다툼’의 일환이 아닌 국민들의 자발적인 ‘의견 표출’로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촛불’로 이어졌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을 선동해 집권한 것이 아닌, 촛불이 만들어 낸 정치 공백의 대안으로 지목됐을 뿐입니다. ‘촛불’과 황 대표의 ‘횃불’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려운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촛불’은 황 대표와 같은 정치인의 ‘부르짖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독재’라는 정치투쟁의 일환이 아닌 ‘먹거리 안전’과 ‘숨겨진 정치권력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현상’입니다. 황 대표가 고안한 ‘횃불’이라는 정치 언어와는 비교 범주가 다릅니다.

‘횃불’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이의 제기’ 수준인지, 박 전 대통령 탄핵 비판과 석방 촉구로 나아갈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횃불’이 현 정부에 대한 비난과 지지자를 집결하기 위한 ‘정치 언어’일 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서울대 김종영은 “정치언어의 특성에 관한 고찰; 히틀러의 언어사용을 중심으로”라는 글에서 ‘정치 언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정치언어는 정치인이 권력을 획득하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각종 언어형식이다. 이를 위해 정치인들은 경우에 따라 상대를 몰아붙여야 하고 대중에게 진실을 의식적으로 왜곡 조종하여 전달해야 한다. 설령 현실에서 그것이 왜곡되거나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다고 해도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가치를 고수해나간다. 여기에 정치언어의 특성이 들어 있다”

황 대표의 ‘횃불’이 ‘촛불’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치를 획득한다면, 횃불은 ‘정치 언어’ 이상이 되긴 힘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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