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 정도상 “훈민정음 창제이후 첫 <말모이>사업”

2019.10.12 17:44 입력 2019.10.14 10:40 수정
원희복 선임기자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 정도상 상임이사. 강윤중 기자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 정도상 상임이사. 강윤중 기자

10월 9일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날을 기념하는 573돌 한글날이었다. 북한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기린다. 한글은 남북 모두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다. 남북은 15년째 <겨레말큰사전>을 만들고 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570여년 만에 완전한 형태로 이뤄지는 겨레말 ‘말모이’ 작업이다. 말모이란 일제강점기 한글학자들이 어렵게 모은 ‘조선말큰사전’ 원고를 의미한다. 올해 초 영화 <말모이>가 상영되면서 많이 알려졌다.

이 말모이는 일제에 압수됐다가 해방 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고, 1957년까지 총 6권으로 <우리말대사전>의 모태가 됐다. 북측은 1992년 별도의 <조선말대사전>을 편찬해 사용 중이다. 따라서 <겨레말큰사전> 편찬작업은 훈민정음 창제 이래 처음으로 남북을 망라한 완벽한 사전 편찬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0월 7·14일 MBC(정길화 PD)는 이 <겨레말큰사전> 제작과정을 2부작 다큐멘터리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 사업을 창안하고 실무를 맡아온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 정도상 상임이사(59)를 10월 4일 서울 마포 사무실에서 만났다.

남북을 망라한 완벽한 사전 편찬작업

-다큐멘터리를 고생해 만들었는데 아쉬운 것은 <겨레말큰사전> 완성은 아니라도, 남북 언어학자가 같이 활발히 편찬작업을 하는 장면을 넣지 못한 점이다.

“그렇다. 26차 편찬회의 장면이 빠져 아쉽다. 2005년부터 시작된 <겨레말큰사전> 작업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인 2010년 중단됐다가 2014년 박근혜 대통령 시절 ‘통일대박론’이 나오면서 다시 4차례 편찬회의가 열리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지난해 10월 4일 평양에서 만나 편찬회의를 재개하기로 했는데 하노이 노딜로 중단된 상태다. 당시 통일부가 북한에 노트북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제지해 편찬회의를 열지 못했다. 남북 공동 편찬회의가 중단된 것은 모두 우리 측 때문이다.”

-유엔제재와 국어사전 편찬사업이 무슨 관계가 있나. 문재인 정부의 첫 통일부 수장인 조명균 장관은 심약한 관료 출신의 한계만 드러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두 번이나 연 남북정상회담 성과를 조명균 장관은 적극 이행하려 하지 않았다. 수십만 단어를 노트북에 담아야지 어떻게 원고를 들고 다니나. 노트북을 북한에 주러 가는 것도 아니고 회의용인데 그것을 왜 한·미 워킹그룹에 물어보나. 그 바람에 지금 ‘통미봉남’을 자초하고 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작업 역사를 간단히 소개해 달라.

“1989년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당시 김일성 주석도 공감했다. 2003년 7월 문 목사 아들 문성근씨와 함께 평양을 방문해 박용길 장로(문 목사의 부인)의 서신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했다. 그 서신에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만들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에 김정일 위원장이 동의, 2004년 3월 합의서를 쓰고 2005년 2월 금강산에서 남북 공동편찬위원회가 발족했다. 그리고 남북 각각 공동 편찬사업회를 만들었다. 우리 측 초대 이사장으로 고은 선생님이 맡아오다 2017년부터 염무웅 선생님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05년 2월 20일 금강산에서 편찬위원회가 결성되고 이후 25차에 걸친 공동 편찬회의를 했다. 그동안 어떤 일을 했나.

“회의는 주로 금강산에서 했고 평양·개성, 선양·베이징 등지에서 했다. 서울에서도 한 번 했다. 우리는 사물에 대해 정치적 해석은 말고, 사물이 갖는 객관적 의미만 기술하자고 사전에 약속했다. 그래도 사전 맨 처음에 나오는 ‘일러두기’를 남북이 합의하는 데 1년 넘게 걸렸다. 또 어문규범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합의하는 것도 힘든 작업이었다. 그리고 사전에 올릴 말, 즉 표제어를 합의하는 데 2~3년 걸렸다. 아직 합의되지 않은 것도 있는데 그것은 사전을 집필해 나가면서 합의하자고 했다. 아직 두음법칙을 남북이 합의하지 못했다.”

중앙아시아 등 동포사회 말까지 채록

-북측에는 두음법칙이 없다.

“두음법칙은 남북의 차이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지역 차이로 발생한 것이다. 백두산 천지를 북은 ‘톈지’에 가깝게 읽는다. 그것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 함경도·평안도 언어는 중국어와 가깝다. ‘로동신문’을 ‘노동신문’으로 합의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병기하자는 얘기도 있다. 그리고 사이시옷의 경우 북은 거의 안 쓰는데, 우리는 너무 많이 쓴다. 국립국어원에서 빨리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겨레말큰사전>의 특징은 표준어를 싣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어를 싣는 것이라 했다.

“<겨레말큰사전>은 표준어 사전이 아니라 보통어 사전이다. 33만개 정도의 단어사전을 만드는데, 북의 <조선말대사전>과 남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른 80만 단어에서 서로 공통된 23만개를 추렸다. 그리고 남북이 오랫동안 사용하던 각 지역어를 조사해 10만개가 넘는 지역어가 실리도록 했다. 이를 위해 남북은 물론 중국 옌볜·중앙아시아 고려인사회·사할린 동포사회 지역어까지 채록했다.”

-영화 <말모이>를 보면 팔도에서 온 사람을 모아놓고 지역어를 말하게 하는 방법으로 방언을 수집하더라.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직접 현장에 가서 채록한다. 우리는 특히 ‘말망’이라는 말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또 19세기부터 2000년대까지 남북이 발표한 거의 모든 시와 소설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청개구리’라는 단어의 경우 남쪽 용례 한 줄, 북쪽 용례 한 줄, 해외 용례 한 줄. 이렇게 세 줄이 들어간다. 삽화도 많이 들어가 기존 사전과 다른 차원의 사전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진척 상황과 앞으로 남은 작업은 무엇인가.

“70~80% 진척됐다지만 허수가 있다. 우리가 추진한 것만 그렇다는 것이고 남북이 합의한 것은 61%밖에 안 된다. 교열·교정을 5회 정도 봐야 하고, 지금 재개해도 앞으로 4년 정도 걸릴 것이다.”

33만 단어가 수록될 <겨레말큰사전>은 고려대에서 만든 2368쪽짜리 <한국어대사전> 3권 분량이다. 이 사전은 전국 중·고등학교 이상 모든 도서관에 보급할 계획이다. 북측도 마찬가지다. 물론 각 포털에도 제공한다. 종이에 인쇄된 사전은 남북이 처음 만들지만 이것은 마지막 종이사전이기도 하다. 이제 더 이상 종이에 인쇄한 사전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사전의 증보·개정작업은 모두 전자사전으로 이뤄진다. 의외로 북측은 초·중·고의 모든 교과서가 1대의 태블릿 PC에 수록돼 있을 정도로 교육정보화가 진척돼 있다고 한다.

이후 편찬위원회는 더 많은 어휘를 담는 전자사전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 작업 역시 쉬운 작업이 아니다. 예를 들면 ‘청개구리’라는 단어 옆에 발음과 동영상까지 삽입하는 방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전자사전이 남북 양측의 컴퓨터에서 구동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남북 통합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은 앞으로 전개될 각종 교류는 물론 금융·경제통합에서도 중요한 기초가 된다. 남북 공동 전자사전은 본래 목적보다 훨씬 많은 성과물을 낳을 사업인 것이다.

2015년 12월 6일부터 13일까지 중국 다롄에서 열린 제25차 공동 편찬위원회 회의. 이후 남북 공동 편찬위가 중단된 상태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위 제공

2015년 12월 6일부터 13일까지 중국 다롄에서 열린 제25차 공동 편찬위원회 회의. 이후 남북 공동 편찬위가 중단된 상태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위 제공

남북 공동 창작집 <통일문학> 복간 논의

정 상임이사는 1960년 경남 함양 출신이다. 1981년 삼수 끝에 전북대 독문과에 입학했다. 문학청년이던 그는 “당시 김원일·황석영·윤흥길 등의 분단문학을 배우면서 분단이 가져온 개인 내면의 상처를 봤다”면서 “분단 극복이 문학에 머물지 않고 행동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6년 전두환 정권이 조작해 강행한 평화의 댐 건설 반대시위로 구속됐다. 복역 중이던 전주교도소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십오방 이야기>를 87년 발표했다.

1988년 장편소설 <천만 개의 불꽃으로 타올라라>, 1990년 역시 장편소설 <아메리카 드림> 등을 발표하는 등 그는 맹렬하게 소설을 쓰는 ‘다작 작가’로 각광을 받았다. 2003년 장편 <누망>으로 제17회 단재문학상, 2008년 연작소설집 <찔레꽃>으로 제25회 요산문학상과 제7회 아름다운작가상 등을 받았다.

그는 소설로만 통일을 쓰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정책실장, ‘통일맞이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그는 “문익환 목사 북한 방문기 <가슴으로 만난 평양>을 읽는데 문 목사가 ‘김일성 주석에게 남북 국어사전을 제안했고 긍정적 대답을 받았다’는 대목을 읽고 ‘이거다’라며 무릎을 탁 쳤다”면서 “소설가 눈에 남북 국어사전이 갖는 의미와 역사가 그려졌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북쪽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남북 통합 국어사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침 그는 남북문학 교류를 위해 북측 사람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는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 총괄집행을 맡아 이뤄냈다. 이 남북작가대회는 2006년 6·15 민족문학인협회로 발전하고, 남북 작가들이 공동 창작집 <통일문학>을 창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통일문학>도 3호 발간을 끝으로 중단됐다. 그는 “지난해 10월 평양에 갔을 때 안동춘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이 ‘남북 작가 교류를 다시 하자’고 말했다”면서 “이 잡지 복간은 금방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광주 (민주항쟁) 40주년을 맞아 <도청>이라는 소설을 낼 계획”이라며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광주도청을 사수한 5월 27일 사람들의 느낌·감성을 장편소설로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단 하루의 시간과 광주도청이라는 공간을 장편소설로 묘사하는 작업은 상당한 ‘내공’이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의 집요한 노력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으로 2005년 <겨레말큰사전> 남북 편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는 중단됐지만 남측 편찬위원회는 계속 존속했다. 하지만 그는 상임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정부는 사실상 그를 퇴직시키려 했지만 고은 이사장의 노력으로 계약직 전문위원으로 사실상 ‘강등’되는 데 그쳤다. 그러다 2017년 10월 다시 상임이사직을 회복했다. 그는 2013년 중앙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중단된 <겨레말큰사전> 편찬 재개를 위해 뛰고 있지만 아직 성과는 없다. 그는 “손뼉도 마주쳐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 편찬사업의 시한은 2022년 4월까지로 돼 있지만 더 연장될 가능성도 있다. 그는 “남북 편찬작업이 재개되면 합숙을 통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나머지 단어에 대한 남북 합의를 이뤄낼 것”이라며 “11월 서울시민청에 <겨레말큰사전> 홍보관도 개관하니 따뜻한 마음으로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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