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는 '생명권'의 주체인가…철학자가 파헤친 낙태죄 결정

2020.10.03 19:47 입력 2020.10.03 21:57 수정

대학생 페미니즘 연합동아리 ‘모두의 페미니즘’ 회원들이 9월2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대학생 페미니즘 연합동아리 ‘모두의 페미니즘’ 회원들이 9월2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태아의 생명권은 실제로 존재하는 권리일까. 생명이 있다면 곧 생명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낙태죄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이런 질문을 외면한 채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충돌하는 방식으로만 이뤄졌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소장은 책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에서 임신중단 문제를 논하려면 ‘생명’과 ‘생명권’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이 소장은 3일 통화에서 “동물과 식물은 살아 있지만 법적 권리인 생명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어떤 존재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생명권, 권리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의견은 태아의 생명과 생명권을 혼동했다. 태아가 생명이 있다는 이유로 생명권의 주체로 인정하면서 논리적 모순이 발생했다”고 했다.

헌재는 지난해 4월 낙태죄 관련 헌법불합치 결정에서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라고 판시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있다고 본 것이다. 헌재 헌법불합치 의견은 “태아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태아도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고 했다.

박이 소장은 헌재의 이같은 판단에 논리적 모순이 있다고 본다. “‘인간에 근접한 상태’라는 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일 수 있는가. 헌법불합치 의견대로 만일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라고 가정한다면, 시점과 상관없이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다. 태아의 생명을 박탈하는 행위는 모두 살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그는 봤다.

박이 소장은 책에서 헌재 결정을 미국 ‘로 대 웨이드’ 판결과 비교한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미국에서 최초로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 판결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1973년 이 판결에서 임신중단이 시민의 기본적 권리라고 인정한 반면 태아의 생명권은 부정했다. 한국 헌재 결정과 극명하게 다른 대목이다. 연방 대법원은 “수정헌법 14조에서 사용된 인격이란 단어는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포함하지 않는다”면서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연방 대법원은 태아에게 ‘생명’은 있다고 판단했다. 더 나아가 생명을 법이 보호해야 할 가치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임신 시기를 세 시기로 나눈 뒤 임신 후기인 제3삼분기(임신 24주 이후)에서는 임신 초·중기와 달리 태아가 의료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궁 밖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있다고 보고, 이때는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해 임신중단을 금지할 수 있다고 했다. 박이 소장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은 태아의 생명과, 법적 권리인 생명권을 분명하게 구분했다”고 했다.

박이 소장에 따르면 민법과 형법 등 한국 법체계에서도 태아는 법적 권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박이 소장은 ‘법적 인간’의 정의에 대해 “자신의 지성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라며 “근대 정치체제와 법체계가 태아를 법적 인간으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현행 법체계 내에서 실질적으로 남은 합리적 선택지를 두 개로 추린다. 태아 생명 보호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임신중단 허용 기간을 제한하는 입장(로 대 웨이드 판결의 입장)이 첫번째다. 두번째는 태아 생명 보호라는 이익이 임신중단 기간을 제한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남은 건 헌재가 방치한 혼란과 모순을 국회가 제거하는 것이다.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률과 제도의 기본원리를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월의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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