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라고 다 그냥 ‘참외’가 아니었다…맛, 이야기 품은 씨앗도서관

2021.06.10 12:24 입력 2021.06.10 12:42 수정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이 <미식예찬>(1825)에 적은 문장입니다. ‘먹을 것’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식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산업, 농업, 경제부터 시작해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돼 있습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도 결코 빼놓을 수 없죠. [먹.진.사]에서는 ‘장르’를 불문하고 ‘먹을 것에 진심인 사람들’을 지금, 만나러 갑니다.


“알렉스는 클라스의 밀을 기다리며 시중에 파는 이미 제분된 통밀가루를 구입했다. 하지만 처음 브리오슈를 구워보고 전부 갖다 버렸다. “‘보기에는’ 괜찮았어요. 부풀기도 잘했고요. 하지만 오븐을 열어도 향이 안났어요” 그는 브리오슈에서 “오래된 옷장에서 나는 먼지 냄새”가 났다고 투덜댔다.”(댄 바버, <제3의 식탁> p.460)

종자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였다. ‘아니 같은 밀이 종자에 따라 저렇게까지 맛이 다를 수 있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농장에 따라, 철에 따라, 일기에 따라 맛이 꽉 들어차기도 하고 고무지우개처럼 빈 맛을 내기도 하는 과채들을 떠올렸다. 곧 수긍했다.

지속가능한 식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 <제3의 식탁>에서 팜투테이블(Farm to table·레스토랑이 직접 농장에서 작물을 키우며 그것을 요리에 직접 활용하는 방식) 트렌드의 선구자인 레스토랑 블루힐(Blue Hill) 셰프 댄 바버는 직접 육종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고,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한 종자를 구해 직접 주방에서 활용한다. 밀의 경우 도정 방식 등에도 영향을 받긴 하지만, 농부 클라스가 오랜 기간 지켜온 섬세한 농법 및 스펠트 밀 종자(Triticum spelta)는 브리오슈의 맛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로도 신비로운 ‘종자’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머릿속을 떠돌았다. 국내에서도 다양한 토종 종자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이들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지난 8일 경기도 수원시 소재 전국씨앗도서관 사회적협동조합을 찾게 됐다.

박영재 관장이 토종 종자인 ‘부채콩’을 들어보이고 있다. 꽃이 화초피듯이 피어난다고 해서 <임원경제지>에는 화초콩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콩알이 작지만 맛이 꽉 들어차 콩나물로 먹거나 장을 담가 먹는 등 활용도가 높다. / 박 관장 제공

박영재 관장이 토종 종자인 ‘부채콩’을 들어보이고 있다. 꽃이 화초피듯이 피어난다고 해서 <임원경제지>에는 화초콩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콩알이 작지만 맛이 꽉 들어차 콩나물로 먹거나 장을 담가 먹는 등 활용도가 높다. / 박 관장 제공

“보통 참외라고 하면 노랗고 동그랗고 깔끔한, 마트에서 파는 과일을 생각하게 되죠. 하지만 원래는 참외라고 해도 굉장히 종류가 많아요. 개구리 참외, 까치 참외 등 모양새도 맛도 천차만별이랍니다.”

박영재 수원씨앗도서관장(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 대표)은 말했다. 토종 종자로 키운 채소·과일과 마트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채소·과일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묻자 돌아온 답이다.

물론 참외뿐 아니라 모든 과채류가 마찬가지다. 만약 콩의 종류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 손가락조차 힘겹게 접을 것이다. ‘잠두콩, 완두콩, 강낭콩, 병아리콩, 메주콩…’ 하지만 국내 콩 종자 연구의 대부인 정규화 전남대 교수가 30년간 직접 채집한 토종 콩 종자만 해도 무려 약 7000점이다. 씨앗도서관이 개설 이후 약 10년간 모은 각종 토종 씨앗들도 약 6000점에 달한다.

박 관장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토종 종자’ 외길을 걸어왔다. 생협에 근무하면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친환경 농산물을 유통하거나 직접 텃밭을 만들어 교육하는 일을 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종자에 관심이 생겼다. “아이들이 처음엔 (친환경 농산물이) 벌레먹고 이러니까 싫어하고 많이 남겼는데, 자기들이 직접 손으로 키워보니까 뿌듯하잖아요. 잘 먹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더 많은 식경험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때부터 고민했죠.” 그 무렵부터 주말 농장을 직접 운영하고 텃밭을 가꾸면서 본격적인 ‘농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수원대 농장에서 교수님들과 같이 농사를 짓게 됐어요. 그러다가 토종 종자를 연구하는 안완식 박사(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초대 센터장)와 연이 닿게 되면서 토종 종자를 함께 수집하러 다니게 됐죠.” 1년에 약 400~600종 정도를 수집하는데, 1주일에 2박3일은 도서 산간 가릴 것 없이 다닌다. 남은 시간 역시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농사 교육을 하며 보낸다. 이날도 그는 농장에 들르느라 흙이 묻은 장화를 신은 채였다.

대체 어떻게 토종 종자를 찾는 걸까?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직접 가서 ‘사람’에게 묻는 방법이다. “막막해 보이죠? 하지만 하다보면 요령이 생겨요. 일단 자연부락을 찾고 그 주변에 꽃밭이 있어야 돼요. 꽃은 씨앗을 해마다 받아서 심어야하기 때문에 꽃밭이 있다는 건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죠.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두분 다 계신 집이면 높은 확률로 토종 씨앗이 있어요.” 농사를 짓는 분들도 전답에는 상업용 양산형 종자를 키우지만 자신들이 직접 드시기 위한 과일 등 푸성귀는 토종을 텃밭에서 키운다. 대체로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로부터 대대로 받아온 토종 씨앗을 키워오는 경우가 많다. “한 곳에서 오래 텃밭을 해오시던 분이면 이름이나 그 종자에 대한 이야기도 꿰고 계시죠. 이건 홀애비콩인데 주름이 쪼골쪼골해서, 대가 한쌍으로 얽지 않고 혼자 커서 홀애비야.” 박 관장은 씨앗뿐 아니라 그 씨앗에 얽힌 삶과 레시피, 이야기도 채집해 온다.

<임원경제지> 등 고문헌에 적혀있는 등 토종 종자에 대한 기록을 ‘단서’ 삼아 역으로 추적해가는 방법도 있다. 한 예로 장단콩(장단백목)이다. 장단콩은 1913년 일제 강점기 권업모범장(농촌진흥청의 전신)이 국내 최초의 콩 장려품종으로 선발한 장단 지역 재래종 콩이다. 껍질이 얇고 노란 색인 것이 특징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장단 지역에 휴전선이 생기면서 품종으로서의 장단콩은 거의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현재 장단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콩들의 품종 자체는 대원, 태광 등 다른 품종이다. 박 관장은 “최근에 안성 지역의 콩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중 북에서 가지고 내려와 보존하고 있던 장단백목 종자를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처럼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토종 종자를 찾아냈을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공주의 한 농가에서 토종 아스파라거스 종자인 ‘방울비짜루’를 얻게 되었을 때 남긴 기념 사진 / 박 관장 제공.

공주의 한 농가에서 토종 아스파라거스 종자인 ‘방울비짜루’를 얻게 되었을 때 남긴 기념 사진 / 박 관장 제공.

매년 수백종을 채집하는데도 계속 새로운 씨앗을 찾을 수 있을까? 박 관장은 말했다. “물론 종자가 겹치는 경우도 많죠. 다만 같은 종자라고 해도, 예를 들어 홍성에서만 채집되던게 창원에서도 나온다하면 따로 채집을 해야해요. 오랜 세월 동안 그 지역에 붙박혀 적응하고 커오면서 굉장히 다른 성질을 갖게 되거든요”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같은 품종의 포도라고 할지라도 기르는 농장에 따라, 서안(西岸)인지 동안(東岸)인지에 따라 다른 와인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같은 품종이라고 해도 다른 기후,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맛이나 특성들이 굉장히 달라지곤 하죠” 이 때문에 현재 씨앗도서관은 전국 각지에 총 15곳이 설립돼있다. 서울 강동씨앗도서관에선 광주 지역 일대의 씨앗을 모으고 관악씨앗도서관에선 과거 금양현(衿陽縣) 지역의 씨앗을 모으는 등 그 지역에서 적응해온 씨앗을 그 지역에서 보존해가기 위한 이유다.

이렇게 모은 토종 씨앗은 씨앗도서관에 모여 다양한 사람들에게 ‘대출’된다. 반납 기한이 정해져있는 것도 아니고, 반납조차 필수는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최선을 다해 종자를 받아다가 키운 뒤 기쁜 마음으로 ‘반납’하러 온다. “귀촌, 농부들이 씨앗을 가져가는 경우도 많지만 도시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체험 학습 이후 종자를 받아가서 키워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농사’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토종 종자를 체험해본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원씨앗도서관의 사진. 전국 각지에 있는 씨앗도서관에서 종자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대출, 직접 키워볼 수 있다. /박 관장 제공.

수원씨앗도서관의 사진. 전국 각지에 있는 씨앗도서관에서 종자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대출, 직접 키워볼 수 있다. /박 관장 제공.

토종 종자는 대지의 순환, 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토종 종자는 농약을 치지 않아도 억세게 자란다. 토착 종자들은 몇 세대를 거쳐가며 그 지역, 기후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남아 씨앗을 남겼기 때문에 타고난 생명력을 지닌다. “토종 종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 뭔지 아세요? 일단 키가 이렇게 커요. 뿌리도 아래로 길고요. 토종 종자라고 한다면 뭔가 허약하고 왜소할 것 같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 지역에서 적응한 토종 종자들은 굉장히 강합니다.” 해외에선 대부분 유기농 인증의 핵심 조건으로 ‘토종 종자일 것’을 강조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상업용 종자를 ‘친환경 비료’로 기른 것도 유기농으로 인정을 받는다. 친환경농업육성법에 따르면 유기종자를 ‘유기농산물 인증 기준에 맞게 생산, 관리된 종자’라고 정의하고 있을 뿐, 꼭 토종 종자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상업용 종자는 애초에 농약을 쓰도록 만들어진 씨앗인데, 이를 농약을 안쳤다는 이유만으로 진정한 유기농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요. 그리고 식물이 자라날 때는 흙 안의 미생물과 잡초 등 모든 생태계에 영향을 받아요. ‘친환경 비료’라고 해도 화학 독성이 아닐 뿐 독성을 가지고 흙 안의 미생물을 파괴하는 것은 같거든요. 토종 종자는 자라날 때 고의로 흙이 지닌 생태계를 파괴할 필요가 없습니다.”

토종 종자가 지닌 ‘맛’에 대해서도 그는 자신감을 보였다. 토종 종자는 맛이 뛰어날 뿐 아니라 다양성 측면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녔다.

“토종 참외를 예로 들면 토종 종자들은 단맛은 보통 조금 떨어지는 대신 과육이 부드럽고 과즙이 적어요. 일반 참외 과육이 단단해서 못드시는 분들도 토종 참외는 잘 먹을 수 있는 거죠. 해외에는 토마토 등 과일도 과즙이 적은 종들도 많고 맛이 쓴맛, 떫은맛 등 다양하니 요리에 두루 이용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그렇지 못한 편이죠.” 실제 과즙이 적은 토종 참외들의 경우 된장에 묻어뒀다가 먹는 ‘참외된장절임’ 등 반찬으로 활용하는 레시피들이 많다. 참외 꼭지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쓴 맛이 나서 차로 우려 마신다. “화성 로컬 농산물마트에 오는 분들 중에선 처음에 매대에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채소들이 있으니까 뭐지? 하고 어색해하는데, 한번 먹어보면 그것만 찾으시더라고요. 대파도 왜대파는 누린내가 나서 국물 낼 때 못쓰겠다고 토종 대파만 찾는 분들도 많아요.”

먹거리교육센터 앞뜰의 텃밭에선 토종 종자로 농작물을 직접 길러 이를 조리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먹거리 교육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잔반은 다시 거름으로 활용한다. 김지원 기자

먹거리교육센터 앞뜰의 텃밭에선 토종 종자로 농작물을 직접 길러 이를 조리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먹거리 교육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잔반은 다시 거름으로 활용한다. 김지원 기자

우리나라에서 종자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는 이유는 영유년기 미각 교육(sensory education)의 부재와도 연관이 있다. 박 관장의 설명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프랑스, 핀란드 등에선 ‘미각 교육’을 교과 과정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아이들이 직접 다양한 먹거리를 감각으로 접해보고, 원물 과채의 다양한 맛을 배우는 과정이다. 많은 이들이 점점 패스트푸드에 익숙해져가면서 어린아이 뿐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시민 미각 교육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미각 교육을 받은 사람의 경우 음식들에 대한 거부감이 현저히 낮아진다. 하지만 국내선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떨어진다. “어렸을 때 다양한 건강한 맛을 접해봐야, 나중에 그 맛을 기억하고 나중에 몸이 필요할 때 그것을 다시 먹을 수 있지만 어렸을 때 미각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게 힘들죠.”

그는 토종 종자의 매력을 알리기 위한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그는 과거 셰프와 협업해 울릉도 홍감자, 강화도 분홍감자 등 토종 감자 종자들을 모아놓고 테이스팅 워크샵을 열기도 했다. “셰프들이 이리저리 볶고, 찌고, 굽고 조리를 하면서 다양하게 맛을 보았죠. 아, 이것은 샐러드용으로 좋겠다. 이것은 카레용으로 좋겠다. 그렇게 제각기 다른 감자의 질감, 맛의 결에 따라 최신 트렌드 레시피와 결합을 해 본 것이죠.”

토종 갓 종자로 머스터드(mustard·겨자) 소스를 만드는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갓은 십자화과(배추과)의 한해살이풀로, 한자로는 개채(芥菜), 겨자라고도 쓴다. 즉 머스터드는 곧 갓이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토종 갓이 많은데 왜 모두들 외국산 겨자를 수입해다 머스타드 소스를 만드는지 궁금했다. 그는 청갓, 뿌리갓 등 우리 토종 갓으로 머스타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같은 ‘머스타드’지만 맛볼 때마다 제각기 다른 신세계가 펼쳐졌다. 다만 아직까진 토종 종자 생산 농가가 많지 않고 수요와 공급을 잇는 연결이 미비해 적극적인 협업 시도는 적은 편이다. 수요와 공급의 연결을 위해 씨앗도서관은 지금까지 도서관이 채집해온 6000여종의 씨앗을 스토리, 레시피, 산지정보, 스토리 등과 함께 매핑(mapping)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농부가 원할 경우 지도에 직접 농부의 연락처 등을 적어 소비자들이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며, 올해 안에 서비스를 선보이는 것이 목표다.

“우리나라에서도 곧 생산지와 소비자들이 촘촘히 연결돼 다양한 경험과 맛을 즐기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는 팔을 한아름 벌리며 눈을 빛냈다.

“수천 개의 종자로, 수천 개의 맛을 내는데, 그걸 수천 명의 사람이 먹어요. 그러면 무한대의 경험이 생겨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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