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지은 1인분의 밥이 주는 ‘힐링’의 감각

2021.08.04 11:37 입력 2021.08.06 15: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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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곡물 경험 브랜드 ‘곡물집’과 ‘스몰바치 스튜디오’의 식경험 디자인

한때 식탁의 주류였던 음식 중에 지금 가장 소외된 것을 뽑는다면 바로 ‘밥’이 아닐까요.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1인 가구로 사는 동안 밥이란 전기밥솥에 한가득 해서 얼려두고 먹다가, 어느 날 빵에 맛이라도 들이게 되면 냉동실 안에서 뱅글뱅글 돌고 마는 존재였는데요.

통계청이 지난 1월 발표한 ‘2020년 양곡 소비량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1인당 쌀 소비량은 57.7kg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10년 전인 1990년의 소비량(119.6kg) 절반 수준입니다.

소득이 높아지면서 전통적 주식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우리나라 만의 일은 아닙니다. 경제학자들은 많은 나라의 전통적 주식이던 빵과 감자도 ‘열등재’로 분류하는데요. 경제적으로 부유해질수록 수요가 오히려 줄어드는 품목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먹던 주식 대신 다른 것을 많이 먹게 되면 언뜻 식탁이 더 풍성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문제는 주식의 질이 평균적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인데요. <월스트리트저널> 칼럼니스트 비 윌슨은 <식사에 대한 생각>에서 과거의 빵과 비교해 첨가물이 많고 영양은 적고 맛도 훨씬 덜한 공장제 빵을 이제는 사람들이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요리의 맛에 대한 깐깐한 평가는 넘쳐나지만 비해 밥에 쓰인 쌀의 질이나 밥맛에 관한 이야기는 보기 드문 국내 상황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밥생각’ 워크숍 참여자들이 토종 곡물 하나하나의 특성을 탐구하고 있다.  어콜렉티브그레인 제공.

‘밥생각’ 워크숍 참여자들이 토종 곡물 하나하나의 특성을 탐구하고 있다. 어콜렉티브그레인 제공.

이처럼 주식의 위상이 점점 떨어지는 와중에 ‘밥’이라는 존재를 다시 보게끔 하는 시도를 소개합니다. 충남 공주를 기반으로 토종 곡물 경험을 제공하는 브랜드 ‘곡물집’에서 기획한 ‘밥에 대한 생각’ 프로그램(이하 ‘밥생각’)인데요. 어떻게 하면 다양한 토종 곡물을 많은 사람이 경험하게 할까 고민하던 곡물집 김현정 대표는 ‘스몰바치 스튜디오’의 강은경 식경험 디자이너와 함께 번거롭고 귀찮은 ‘밥 짓기’를 자신을 위한 돌봄의 과정으로 바꿔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밥생각 참여자들은 장인이 만든 1인용 옹기솥에 밥을 짓고, 공들여 지은 밥을 천천히 씹어 먹으며 그동안 화려한 요리의 맛에 묻혀 알아챌 겨를이 없었던 곡물의 맛을 탐구합니다.

밥을 짓기에 앞서 농부가 직접 곡물에 대해 설명을 해 주기도 하고, 솥밥을 짓는 옹기를 만든 장인이 직접 그릇에 관해 설명해 주는 시간도 곁들였다고 합니다. 참여자들이 각자 공들여 지은 밥으로 요리사와 함께 제철 채소를 곁들인 한상차림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카페 ‘곡물집’에서 열린 ‘밥에 대한 생각’ 워크숍에서 참여자들이 1인용 옹기솥에 밥을 지었다. 이 솥은 전북 진안군에서 ‘손내옹기’를 운영하는 무형문화재 이현배 옹기장이 만들었다. 어콜렉티브그레인 제공

카페 ‘곡물집’에서 열린 ‘밥에 대한 생각’ 워크숍에서 참여자들이 1인용 옹기솥에 밥을 지었다. 이 솥은 전북 진안군에서 ‘손내옹기’를 운영하는 무형문화재 이현배 옹기장이 만들었다. 어콜렉티브그레인 제공

새로운 조리법과 다채로운 양념이 넘쳐나는 시대에 곡물을 다루고 음미하는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 끼니를 때우기 위해, 혹은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전쟁 치르듯이 해치운 밥을 생각하면 더없이 사치스러운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어쩌면 현대인에게 필요한 영혼의 사치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요?

밥생각을 기획한 어콜렉티브그레인 농업회사법인 김현정 대표, 강은경 식경험 디자이너와 나눈 이야기를 전합니다.

- 곡물집集 은 어떤 브랜드인가요.

김현정 = 토종 곡물을 소재로 식문화 전반에 대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공주 원도심의 한옥 카페 겸 작업실 곡물집에 오시면 토종 곡물을 소량으로 구매하실 수 있어요. 토종 곡물로 음료, 빵, 간식, 잼 등을 개발하기도 하고, 밥생각을 비롯한 곡물경험워크숍을 열기도 해요. 지난해 8월에 문을 열어 이제 꼭 1년이 되었습니다.

카페 곡물집에 모인 어콜렉티브그레인 김현정 대표(왼쪽 네번째)와 동료들. 채용민 PD

카페 곡물집에 모인 어콜렉티브그레인 김현정 대표(왼쪽 네번째)와 동료들. 채용민 PD

토종 씨앗은 농부가 농사를 짓고 그 결과물이 우리 사회 안에서 계속 소비되는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계속 이어질 수 있거든요. 농부를 중심으로 인문학자, 요리사, 과학자, 디자이너 등 여러 전문가와 협업해 곡물 하나하나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경험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어요.

- 식문화에 대한 경험을 확장하기 위해 ‘곡물’을 선택한 점이 흥미롭네요.

김현정 = 핵심은 다양성이에요. 토종 곡물은 소량으로 생산되거든요. 시장 구조에 의해 생산성은 떨어지는 품종이지만 맛과 특징이 다 다르기 때문에, 선택해서 맛을 본다면 자신에게 맞는 커피 원두를 고르듯이 새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카페 곡물집에서 판매하는 ‘빈 라떼’는 미숫가루와 비슷한 음료인데요. 여러 곡물을 섞어 만드는 시중의 미숫가루와 다르게 각각 한 종류의 토종 콩으로만 만들어서 특징을 느낄 수 있게 했어요. 커피로 치면 ‘블렌드’가 아닌 ‘싱글 오리진’이라고 할 수 있죠.

곡물집에서는 다양한 토종 곡물을 소량으로 판매하는데요. 이 제품들을 쉽게 경험할 계기를 만들기 위해 강은경 디자이너와 함께 ‘곡물경험워크숍’을 기획했습니다.

곡물집에서 판매하는 토종 콩 제품들. 채용민 PD

곡물집에서 판매하는 토종 콩 제품들. 채용민 PD

- 요리가 아닌 밥 자체로 만든 프로그램은 흔치 않은 것 같아요.

강은경 = 밥이나 곡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최근 몇 년간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에게 밥은 ‘탄수화물’이고 ‘살찌는 음식’이 되었지요. 하루에 밥을 한 끼도 먹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졌고요. 다른 편에는 한국의 낮은 식량 자급률이나 식량 주권에 관해 얘기하면서 ‘토종 곡물을 지켜야 한다’ ‘밥을 더 많이 먹읍시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죠.

밥이라는 것을 영양성분이나 칼로리로 보느냐, 윤리와 생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만, 저는 ‘먹자’와 ‘먹지 말자’로 양분되는 식의 관점에서 좀 벗어나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만들고 싶었어요. 밥짓기를 명상하듯 경험하기, 밥 명상, 밥 요가, 이런 키워드로 만들어낸 식경험이 명상적 밥짓기 워크숍 ‘밥생각’이에요.

‘밥에 대한 생각’ 워크숍에서 참여자들이 직접 지은 밥과 제철 음식으로 차려낸 한 상. 어콜렉티브그레인 제공.

‘밥에 대한 생각’ 워크숍에서 참여자들이 직접 지은 밥과 제철 음식으로 차려낸 한 상. 어콜렉티브그레인 제공.

- 1인 옹기솥에 밥을 짓기로 한 점도 흥미로웠어요.

강은경 = 곡물집에서 워크숍을 제안받고 저도 옹기솥에 1인분의 잡곡밥을 처음으로 지어봤어요. 제가 식경험 디자이너이지만, 저만을 위해 1인분의 밥을 지은 건 정말 처음이었어요. 쌀을 고르고 씻어서 솥에 안치고 물을 잡는 일, 불에 올려서 끓기를 기다렸다가, 익는 타이밍을 가늠해보면서 불 조절을 하고 뜸을 들이는 일, 그리고 드디어 뚜껑을 열었을 때. 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 명상적이었어요. 30분 남짓을 딴짓도 딴생각도 없이 오롯이 그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나를 위해 쓰고 싶어서 그토록 아낀, 그 조리의 시간이 명상의 시간이 될 수 있더라고요.

우리가 매끼를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거에요. 하지만 매일 먹기 때문에, 밥솥에 항상 있기 때문에, 식당에서 고작 1000원밖에 하지 않는 음식이라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가치가 ‘밥 짓기’라는 경험 속에 있는 것 같아요.

- 참여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김현정 = 토종 곡물의 생김새를 살펴보고, 맛을 보고, 식감을 느끼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매우 많은 얘기들이 나와요. 어떤 분은 곡물이 불러오는 옛 추억과 기억에 집중하셨고, 어느 분은 콩마다 식감과 목 넘김이 다른 부분을 흥미로워하셨어요. 강은경 선생님도 콩이라고 하면 ‘어릴 때 항상 먹기 싫어서 주머니 속에 숨겨놓았던 것’이라고 하셨는데요.(웃음)

각자의 옹기솥을 앞에 놓고 불조절을 하는 참여자들. 어콜렉티브그레인 제공

각자의 옹기솥을 앞에 놓고 불조절을 하는 참여자들. 어콜렉티브그레인 제공

어떤 분은 나만을 위해 정성스럽게 밥을 짓는 시간을 경험하고 나서 ‘매일은 힘드니 주말의 루틴이라도 바꿔봐야겠다’ 생각하셨다고 해요. 주말 한 끼는 꼭 1인 솥에 밥을 지어서 정성스레 나를 대접해 보니, 그 한 끼가 지난 한 주의 나를 위로해 주고 또 시작되는 한 주를 응원하는 느낌이었다고 했어요.

더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집에서 가볍게 하실 수 있도록 ‘곡물경험 키트’도 준비하고 있어요. 곡물 활용에 대한 교재인 셈이죠.

- 앞으로 식문화와 관련해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시나요.

강은경 = 산업화된 푸드시스템 속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평생 소비자의 역할만 하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잖아요. 앞으로 함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그게 전부가 아니란 것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뭘 먹지’라는 매일의 고민과 선택이 거대한 푸드 시스템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데 끼치는 영향력도 점점 더 알게 되면서, 우리가 소비자로서 식재료나 음식을 구매하는 것 이외의 경험을 계속 새롭게 제공하고 싶어요.

지난해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이 지역 ‘토박이’ 모녀와 함께 봄나물 채집에 나선 강은경 스몰바치스튜디오 대표(가운데). 스몰바치스튜디오·라이스브루잉시스터즈클럽 제공

지난해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이 지역 ‘토박이’ 모녀와 함께 봄나물 채집에 나선 강은경 스몰바치스튜디오 대표(가운데). 스몰바치스튜디오·라이스브루잉시스터즈클럽 제공

다양한 봄나물을 채집하러 가 보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무말랭이를 만들어보는 일일 수도 있지요. 우리는 이전 세대가 일상에서 자연스레 경험하던 것들을 이제는 애써 찾아 들추어내어야 경험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요. 어쩌면 ‘오래된 미래’라는 말처럼 식경험의 미래는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이 먹고 살던 생태적인 방식에서 오늘에 맞는 가치와 방법을 다시 발견해나가는 일인 것 같기도 해요.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이 <미식예찬>(1825)에 쓴 문장입니다. ‘먹을 것’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식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산업, 농업, 경제부터 시작해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돼 있습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도 결코 빼놓을 수 없죠. [먹.진.사]에서는 ‘장르’를 불문하고 ‘먹을 것에 진심인 사람들’을 지금,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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