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를 망치는 법

2024.06.23 20:13 입력 2024.06.23 20:15 수정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그랬지만 국민권익위원회를 보니 자명하다. 제도가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다.

최소한의 내적 정합성도 갖추지 못한 위원회 결정은 그 과정과 결론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다. 제도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결정의 타당성에 대한 시비와 별도로, 애초에 그렇게 막가는 방식으로 운영해도 되는 것이냐는 탄식이 나온다. 예외가 일상처럼 보이고, 남용이 예상 가능한 순간 제도는 이미 망가져 있다.

생각해 보면, 막가자는 운영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제도란 없다. 아무리 탄탄하게 외압을 막자고 위원회 구성을 규정하고, 아무리 촘촘하게 내적으로 정합한 규정을 만들어도 그렇다. 누군가 작정하고 제도를 남용하겠다고 나서면 소용없다. 남용이란 개념 자체가 이미 작동하는 제도적 장치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도란 장기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고들 한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작동하는 제도란 없다는 뜻이다. 역사적 조건에 따라 오용되기도 하고, ‘악인의 지렛대’로 인해서 흔들릴 수도 있지만, 법문을 고쳐나가고 규범을 가다듬으며 정당성을 차근차근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견뎌서 살아남은 제도만이 현재의 일부가 된다. 최소한의 내적 정합성도 갖추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외부의 압박에 굴복하는 제도는 결국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참조자료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미 작동하고 있는 제도를 개혁하자면서, 예외를 일상적으로 만들고, 남용을 초대하는 방식으로 바꾸자면 어쩌자는 말인가. 이른바 ‘가짜뉴스’를 때려잡겠다며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언론중재법에 처벌조항을 도입하자는 주장 말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남용되고 악용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세계 곳곳의 ‘스트롱맨’들이 가짜뉴스 규제를 명목으로 내세워 독립적인 언론보도를 규제하고, 정치적 탄압을 정당화하고 있다. 자신의 명예만 존엄하다고 믿고, 주변의 비리와 권력남용이 폭로될 것이 두려운 권력자야말로 이 법을 환영할 것이다.

하나의 제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위태하고도 지난한 일이다. 언론중재위원회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언론중재위원회는 1980년 12월24일 신군부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발의하고 가결한 ‘언론기본법안’의 일부로 우리 역사에 등장했다. 언론기본법은 이미 단행한 언론사 강제통폐합과 언론인 해직조치에 더해서 언론사 등록을 취소할 수도 있게 법제화한 결과다. 그러나 언론기본법은 국가 및 공공단체에 대한 정보청구권, 취재원의 진술거부권, 그리고 언론에 의한 피해구제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중재제도 등도 포함했는데, 이들은 민주정에서 제대로 운영하면 명실상부 제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

1987년 민주화 이행을 하면서 언론기본법 폐지 또는 개정을 촉구하는 법률안이 쏟아졌다. 그러나 언론학자 이승선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언론기본법 개폐 논의 중에 언론중재위원회를 없애자는 주장은 없었다고 한다. 민주화 이행의 시기에 이 제도를 언론통제가 아닌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일종의 합의가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결과다. 실제로 이 제도는 언론매체가 증가하고 새로운 매체와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제기되는 피해구제 요구의 증가에 따라서, 그리고 언론자유와 상충하는 인격권을 조문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정교하게 제도적 발판을 갖추었다. 고유한 제도의 성공이 드문 우리 공화국에서 언론중재위원회는 역사성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제도적 정합성을 갖추어 온 몇 안 되는 성공 사례 중 하나다. 이 제도를 언론을 입막음하는 수단으로 남용될 것이 뻔히 보이는 길로 내몰아야 하겠는가.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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