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초동조치 미흡’ 여론 비판 커지자 전두환까지 나서 수사 압박…진범은 체육교사

2022.10.25 22:34

중학생 이윤상군 유괴 살인 사건은

유괴된 이윤상군 찾기 운동을 벌이는 보이스카우트 대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유괴된 이윤상군 찾기 운동을 벌이는 보이스카우트 대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모든 수사기관을 동원하여 이른 시일 안에 이윤상군이 부모 품에 돌아가게 되도록 최대의 노력을 하라.”

1981년 2월27일 대통령 전두환씨는 이 같은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중학교 1학년 이윤상군(당시 14세)이 유괴된 지 107일째 되는 날이었다. 비밀리에 수사를 벌여왔던 경찰도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우표를 사고 체육선생님을 만난 뒤 집에 오겠다던 이군이 종적을 감춘 것은 1980년 11월13일이다. 그날 밤 이군의 아버지는 “4000만원을 준비하라”는 협박 전화를 받았다. 뒤이어 전화를 건 젊은 여성은 “경찰에 신고하면 아들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했다.

범인들은 협박 전화를 62통 걸고 편지도 5통 보내왔다. 아동이 아닌 11세 이상 소년이 유괴된 것은 처음이었다. 여성이 낀 3~4인조 범행으로 추정되는 점도 기존 유괴 사건과 달랐다. 경찰은 면식범에 의한 계획범행으로 판단해 이군과 그의 부모 주변 인물을 500명 넘게 조사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사건이 공개수사로 전환되자 경찰 초동조치가 미흡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경향신문은 “주로 8명의 형사가 사건에 매달렸으나 다른 사건도 같이 처리하느라 전념할 수 없었던 게 문제”라며 “세 달이 지난 후에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기에는 적기를 놓쳤다”고 평했다.

국민적 관심 속에 공개수사가 시작된 지 2주일이 다 되어가자 전두환씨는 3월11일 수사본부를 직접 찾았다. “범인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잡아야 한다”고 한 그는 자택을 찾아가 이군의 부모도 만났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언제쯤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라며 이군을 찾는 캠페인송이 송출될 정도로 주목도가 높았다.

대통령과 여론의 압박에 경찰은 수사본부 몸집을 키웠다. 한 달 만에 전담 요원을 36명에서 322명 8개반까지 늘렸다. 현상금 3000만원과 1계급 특진을 사건 해결 포상으로 걸기도 했다.

이 같은 총력 투입에도 수사는 난항이었다. 경찰은 1981년 11월3일 기준 용의자 1689명, 주변 인물 719명, 차량 8100여대를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200여만명에 대한 지문 조회도 실시했다. 사건 발생 1년이 넘어가자 장기미제사건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진범은 1981년 11월30일 검거됐다. 주영형(당시 28세)과 그를 도운 여고생 2명이 벌인 일로 드러났다. 주영형은 이군이 납치 당일 만나기로 했던 체육교사였다. 코앞에 진범이 있었던 것이다. 주영형은 수사 초기부터 “만나기로 했는데 이군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이후 경찰은 허위 알리바이를 밝혀 그로부터 범행을 자백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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