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서 대기실 남·여 구분 ‘경악’…알고보니, 차별 아닌 여성 배려였다

2023.10.06 16:16 입력 2023.10.06 16:40 수정
조혜임

아라비안 라이프 | UAE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실내 놀이터에서 아이 돌보미가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있는 모습. UAE에서는 아이 돌보미들도 유니폼을 입는 것이 보편적이다(왼쪽 사진). 전통 의상인 히잡과 아바야를 판매하는 매장 내부 모습.

실내 놀이터에서 아이 돌보미가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있는 모습. UAE에서는 아이 돌보미들도 유니폼을 입는 것이 보편적이다(왼쪽 사진). 전통 의상인 히잡과 아바야를 판매하는 매장 내부 모습.

아랍에미리트연합(UAE) 현지 신문 1면에 게재된 한 여성의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까만 히잡 위에 안전모를 눌러쓰고 푸른 작업복을 입은 그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지만 팔짱을 낀 여유로운 자세와 의기양양한 눈빛이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신문은 그를 알루미늄 탄소 공장의 용광로에서 크레인 운전을 하는 최초의 여성 자국민이라고 소개했다. 다양한 방면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자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쏟아낸 그날은 에미라티(Emirati: UAE 자국민을 일컫는 표현) 여성의날이었다. 그들이 이룬 성 평등의 업적과 여성의 역량 강화를 기리기 위해 도시 곳곳에서 크고 작은 이벤트와 파티가 열렸다.

‘까만 히잡’으로 상징되는 아랍 여인들의 삶은 무척이나 갑갑하고 수동적으로 보이고, 현재까지 논란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매체를 통해 접하는 그들의 삶은 단순히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의복, 결혼, 외출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선택의 자유가 박탈당했다고 조명된다. 나 또한 아랍의 소식을 미디어로만 접했을 때는 히잡을 쓴 모든 여성의 삶이 이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 같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막상 그네들과 부대끼며 지내보니 우리네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지난 십수년간 UAE는 사회 곳곳에서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했다. 그 첫 번째가 교육, 두 번째가 고용 보장이었다. 여성의 역량을 강화하여 남성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게 이공계 진출 장려였다. UAE의 대표적인 공과대학인 칼리파대학은 남녀 성비가 5 대 5에 달할 정도로 여성의 이공계 진학률이 높은 편이다. 산업첨단기술부(MoIAT)에 1987년생의 젊은 여성 장관 사라 빈트 유시프 알 아미리를 등용하여 여성 과학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여성과 아이는 보호 대상으로 여겨
십수년 여성 교육·고용 보장 강화
이공계 진출 장려, 공대 성비 5:5
산업부 장관도 여성 과학자 출신

여성 노동자의 취업 기회 늘어나며
자녀 2~3명 키우는 워킹맘도 흔해
외국인 아이돌보미 고용도 손쉬워
경력단절 걱정 없고 성장 기회 제공

전통 히잡에 대한 강제 사라졌지만
개인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착용
아랍 여성들과 부대끼며 살아보니
그간 지녀온 편견은 와장창 깨졌다

이처럼 여성들의 배움이 교과서에 머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핵심 자리에 반드시 여성을 등용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연방국회의(Federal National Council) 직책의 과반수가 여성이며 내각 여성 장관의 비율은 약 30%에 달한다. 기업의 이사회에도 여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세계경제포럼의 2023년 성평등 보고서에서 총 146개국 중 71위를 차지했다(한국은 104위로 UAE보다 낮은 순위에 머물고 있다). 중동 국가 및 북아프리카 13개국은 UAE와 이스라엘(83위)을 제외하고는 전부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으니 이슬람 국가인 UAE 또한 여성 인권이 탄압받는 나라라고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최근 UAE 정부는 자국민 고용 쿼터제를 도입하고 이를 어긴 기업들에 벌금 총 4억디르함(약 1300억원)을 부과하였다. 정부가 내세운 자국민 고용 비율의 목표가 2026년에는 10%까지 늘어날 계획이니 여성 근로자의 취업 기회도 함께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아이 2~3명을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워킹맘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전쟁 같은 아침 등굣길에도 그들은 짙은 오우드(Oud·침향) 향이 나는 아바야와 히잡을 두르고 메이크업을 풀세팅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겨우 눈곱만 떼고 허둥지둥 나온 나는 그들에게 꼭두새벽부터 어떻게 아이들 도시락 준비에 화장까지 하느냐고 물어본다. 그들은 신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이돌보미의 힘을 빌린다고 했다. 그들이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데에는 외국인 아이돌보미를 쉽게 고용할 수 있는 환경이 그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가정에 상주하는 아이돌보미의 월평균 급여는 우리 돈으로 100만원 정도이다. 고용주는 여기에 추가로 숙식(UAE는 한국보다 땅값이 저렴한 편이라 집이 넓어 가정집에 가사도우미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갖추어져 있다)과 일을 할 때 입는 의복을 지급하고, 비자 발급 수수료 및 2년에 한 번 본국을 다녀올 수 있는 항공권을 제공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를 모두 더해도 월평균 비용이 150만원 선이다. 아프리카나 인도 국적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본국에서 면접을 보고 인력을 구해서 본인이 스폰서를 하여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경우는 UAE에서의 근무 경험을 마련해 주는 것이니 조금 더 낮게 급여 협상이 가능하다고 귀띔해 주었다. 자국의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필리핀, 남아시아 및 아프리카 국적의 사람들은 UAE에서의 월급을 차곡차곡 모으면 자국에서 집안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귀한 기회가 되니 이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일할 사람이 필요한 UAE와 일자리가 필요한 주변 국가 사람들의 선순환 구조를 견고히 하기 위해 작년부터 UAE 정부가 직접 나섰다. 인적자원부 산하에 Tadbeer라는 기관을 만들고 해당 기관을 통해 가사도우미, 아이돌보미를 고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관은 인력 소개나 비자 발급 대행 업무뿐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감시자 역할도 자처하고 있다.

오전 8시에 등교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오후 3시경 학교를 마친다. 학교에 마련된 방과후 수업에 등록하면 오후 4시경에 하교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의 개념이 없는 이곳은 대다수의 아이가 스쿨버스나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하는데 출퇴근 자율근무제인 기업이 많아 부모의 출퇴근길에 등하교가 가능하다. 문제는 아이가 먹을 점심 도시락 준비와 잦고 긴 방학 그리고 아플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인데 이때 상주하는 아이돌보미의 역할이 빛을 발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부모가 일하는 낮 동안의 집 안 청소와 정리 등을 해주니 엄마 또한 일에 집중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추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아이돌보미의 도움을 받는 지인들은 경력을 포기하지 않고 일을 하면서도 주말에는 대학원에 가서 경쟁력을 쌓는 일 또한 미루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평일엔 아이들이 열이라도 날까 봐 조마조마하고 주말엔 밀린 집안일 폭탄을 해치웠던 나의 지난날들이 괜스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부다비 생활을 시작하며 외국인 등록이나 운전면허 등을 신청하기 위해 관공서를 들를 일이 있었다. 관공서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목과 발목을 가리는 긴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평소대로 무릎 아래로 조금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고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고 결국 집에 가서 긴 옷으로 갈아입고 와야만 했다. 관공서 안의 대기실에 남성과 여성의 자리라는 푯말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뜩이나 아랍 세계에 대해 짙은 색안경을 끼고 있던 나는 이런 규정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입을 삐쭉 내밀고 경찰서의 긴 대기 줄 뒤에 서 있을 때였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다가오더니 자신을 따라오라며 손짓을 했다. 그는 내가 서 있던 줄의 맨 앞으로 나를 데려가 가장 먼저 일을 처리하도록 도와주었다. 영문도 모르고 새치기를 한 것만 같아 마음이 영 불편했다. 며칠 뒤 이곳에서 오래 지낸 지인에게 물어보니 UAE 사람들은 여성을 ‘보호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성들이 많은 곳에 여성이 있다면 일처리를 우선 끝마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문화가 있다고 했다. 지인은 경찰서나 관공서 특성상 남자들이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 그랬을 것이라며 자신은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데리고 갔는데 줄도 설 필요 없이 순식간에 일처리가 끝났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UAE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여자 그리고 아이에 관대한 이곳의 문화가 마음에 든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이슬람의 상징이라 여기는 히잡은 사실 그 이전부터 뜨거운 태양볕과 모래바람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쓰였다. 당시의 아라비아반도는 이미 남성 중심의 사회를 형성해왔고 부족 간의 잦은 전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강간이나 약탈이 횡행하였다. 전투를 할 수 있는 남성의 가치가 귀하게 여겨졌고 여성은 이들의 소유물이었다. 전쟁에서 진 부족의 여성들은 다른 부족의 전리품이 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이처럼 아랍 사회에 팽배했던 여성 차별은 7세기경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개선되기 시작했다. 히잡이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 히잡에 대한 강제사항은 없어졌지만 여성에 대한 배려는 관습처럼 이어져 오고 있다. 강제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히잡을 고집하는 지인들에게 이를 꼭 입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느냐 물으니, 요즘은 개인의 신념이나 취향을 더 존중한다고 한다. 겸손한 마음가짐과 품위를 지키도록 돕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신실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히잡과 아바야를 걸치면 안에 아무거나 입어도 되니 오히려 편해서 입는다는 의견과 다양해진 디자인과 원단이 마음에 들어 입는다는 의견도 있었다. 히잡을 둘러싼 나의 편견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다른 삶]관공서 대기실 남·여 구분 ‘경악’…알고보니, 차별 아닌 여성 배려였다


조혜임

국내외 기업에서 커뮤니케이터로 일했다. 현재는 남편, 쌍둥이 딸과 아랍에미리트연합에 거주하며 현지의 일상을 글과 그림에 담아 소셜 플랫폼에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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