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수어통역 사라지자 ‘병원 업무’로 마비된 서대문구 수어통역센터

2023.11.01 17:26 입력 2023.11.01 18:36 수정

농인 부부 탄닌핑씨(57)와 전길수씨(56)와 동행한 김솔지 수어통역사가 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데스크 직원에게 주차증 발권 장소를 문의하고 있다. 전지현 기자

농인 부부 탄닌핑씨(57)와 전길수씨(56)와 동행한 김솔지 수어통역사가 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데스크 직원에게 주차증 발권 장소를 문의하고 있다. 전지현 기자

농인(청각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 부부 탄닌핑씨(57)와 전길수씨(56)는 부인 탄씨의 당뇨 진료를 위해 7년 전부터 1년에 3~4번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해왔다. 경기도 김포시에 거주하는 부부가 세브란스를 다니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의 ‘의료 전문 수어통역사’ 때문이었다. 수어로 대화하는 그들에게 2013년부터 종합병원 최초로 전문 통역사를 채용한 세브란스는 소통 걱정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상급병원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2월 세브란스는 수어통역서비스를 중단했다. 갑작스러운 수어통역사의 부재에 탄씨는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예약 날짜가 다가와서 통역사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직전까지 답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매우 걱정했다”며 “의사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눠야 하나, 별 생각을 다 했다”고 했다.

세브란스에서 수어통역사가 없어진 지 2년째. 비어 버린 ‘의료 통역’의 수요는 서대문구 수어통역센터(센터장 김봉관)로 몰려들었다. 수어통역사 4명과 센터장 1명으로 구성된 센터는 세브란스에서 밀려온 요청으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전국의 세브란스 방문 환자들이 서대문구 수어통역센터로

경향신문이 지난달 6일과 26일 만난 서대문구 수어통역센터 근무자들은 “세브란스의 자체 수어통역이 중단된 후 몰리는 의료 통역 신청이 과다해 감당이 안 될 지경”이라고 입을 모았다. 서대문구에 거주하는 농인(듣지 못하는 사람)뿐 아니라 전국의 농인 환자가 세브란스를 방문할 때 센터 근무자들이 동행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사전 예약, 예약 확인, 예약 취소 모두 센터가 돕고 있다. 김솔지 수어통역사는 “주민센터에서의 수급상담과 등본 발급, 동네 병원 진료 등 지역 농인의 요청보다 세브란스로 타지에서 올라오는 이들의 통역까지 맡아야 하니 업무가 확실히 과중해졌다”고 했다.

과중한 업무량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세브란스에 통역사가 사라진 2022년의 ‘의료통역’ 요청 건수(1709건)는 병원 통역사가 있던 2018년(517건)에 비해 3배 이상 늘었다. 그 중 병원까지 동행하는 출장통역 건수는 2018년 379건에서 2022년 1463건으로 훌쩍 뛰었다. 센터에 따르면 세브란스 관련 통역 요청은 일 평균 2~3건씩 꾸준히 들어온다.

센터 통역사들이 세브란스에 총출동하는 일도 빈번하다. 기자가 김 통역사, 탄씨 부부와 함께 세브란스를 찾은 지난달 26일 오후 2시쯤에도 병원에는 3명의 수어통역사가 병원 곳곳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날은 서대문구에 거주하는 농인 식도암 환자에게 응급상황이 생겼다. 수술을 한 지 몇 주 되지 않은 환자였다. 환자가 병원에 온다는 소식에 통역사는 급히 병원으로 왔다. “이미 응급실이 다 찼으니 돌아가야 한다”는 병원 측에 “세브란스에서 최근 수술을 했다. 처치라도 해달라”고 즉각 항의한 것도 통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농인 환자가 수어가 통하지 않는 청인(청각을 사용하는 사람)과 소통하기는 평소보다 몇 배는 어려워진다.

긴급 상황이 생기면 맡은 일이 바뀌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날도 농인 식도암 환자 통역에 불려간 동료 대신, 그가 돕기로 했던 피부과 환자 진료 통역을 김 통역사가 맡았다. 김 통역사는 “서울시청에서 통역 일정이 잡혀 있는데,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연신 시계를 들여다봤다. 대형병원에서 대기는 일상적인 일이다. 통역사들은 대기 시간에 발목이 잡혀 시간에 쫓기는 일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농인들에게 통역 전문성·연속성을 보장해야

농인 부부 탄닌핑씨(57)·전길수씨(56)와 동행한 김솔지 수어통역사가 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전지현 기자

농인 부부 탄닌핑씨(57)·전길수씨(56)와 동행한 김솔지 수어통역사가 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전지현 기자

농인들도 불편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겪고 있다. 이전에는 병원에서 통역 매칭이 바로 이뤄졌지만 이제는 병원 스케줄이 잡히면 영상 통화나 문자로 센터에 알리고, 또 일정이 바뀌면 다시 연락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 전씨는 “통역사가 병원에 계실 때는 일정을 알아서 확인해주셨는데, 센터는 아무래도 다른 업무가 많다보니 신청이 누락되기도 한다”고 수어로 김 통역사를 통해 전했다.

의료 전문성·연결성 측면에서도 농인들은 아쉬움을 느낀다. 탄씨는 “이전엔 약물부작용을 바로 공유할 수 있고, 증상이 바뀔 때 병원에 차트가 있으니 바로 상담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게 안 된다”고 했다.

‘손이 비는’ 통역사가 그때그때 나서다 보니 환자의 병력이나 상태를 알고 통역하기도 어렵다. 전씨는 “통역사가 때마다 바뀌니 병력을 매번 설명해야 한다”며 “수어에 통역이 필요하다는 걸 병원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더욱이 건강과 관련된 것이지 않나. 어느 분야보다 정확한 소통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했다.

상급병원인 세브란스를 이용하는 농인들은 암환자 등 중증인 경우가 많아 병원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통역 사각지대에 내몰린 농인들이 다른 병원을 찾아 떠나기보다 세브란스에 통역사 채용을 요구하는 이유다. 지난 5~7월, 서대문구 관내 농인들은 병원 앞에서 돌아가며 1인 시위를 벌였지만 병원은 응답하지 않았다. 2020년 한국수어 활용 조사 결과보고서를 보면 농인들은 수어 통역이 가장 필요한 분야로 ‘의료분야(35.4%)’를 꼽았다. 고려대 안암병원은 지난 9월 수어통역사 2명을 채용했다.

한 농인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 앞에서 ‘상급병원은 수어통역사를 채용 배치하라’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서대문구 수어통역센터 제공

한 농인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 앞에서 ‘상급병원은 수어통역사를 채용 배치하라’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서대문구 수어통역센터 제공

세브란스 관계자는 수어통역 중단에 대해 “복합적 원인으로 중단하게 돼, 정확한 중단 사유를 짚어 말하기 어렵다”면서 “기존의 수어 서비스 요청 창구는 살려두고, 요청이 들어오면 서대문구에 있는 수어통역센터로 연결해 지원을 보조하고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수어통역사 채용은 예정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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