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김장이라니…이란 배추·두바이 무·한국 고춧가루로 김치 완성

2023.11.03 16:09 입력 2023.11.03 16:14 수정
조혜임

아라비안 라이프 | UAE에서 생애 첫 김장 도전

중국마트에서 파는 중국산 배추, 사진 속 가격표처럼 세일기간에는 1㎏당 한화 600원대에 구입할수 있다. 평소 아부다비에서 판매되는 배추 가격은 1㎏당 중국산은 2000원, 이란산은 4000원꼴이다.

중국마트에서 파는 중국산 배추, 사진 속 가격표처럼 세일기간에는 1㎏당 한화 600원대에 구입할수 있다. 평소 아부다비에서 판매되는 배추 가격은 1㎏당 중국산은 2000원, 이란산은 4000원꼴이다.

“이란 배추가 속이 노랗고 실하더라고요.”

이웃의 SNS 계정에 갓 담근 김치 사진이 올라왔다. 늘 정갈한 한식 요리로 채워진 그의 식탁과 빵 쪼가리로 채워진 우리 집 식탁이 비교가 되어 마음 한구석이 영 찜찜했지만 ‘외국에 나와서 어떻게 다 차려 먹나’ 하며 애써 눈을 감았다. 그런데 신선함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그 김치 사진을 보니 입안에 군침이 도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김장을 할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비법을 알려줄 테니 날을 잡자고 했다.

김치 종주국에서 태어나 매일 김치를 먹었던 나는 안타깝게도 김장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 사실을 특별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이곳에서 만난 외국인들은 그런 이야기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나는 “한국은 어디서나 김치를 살 수 있어서 보통은 사 먹어. 그게 훨씬 경제적일걸?”하며 둘러대곤 했다. 한식을 좋아하는 그네들이 같이 김장을 하자고 꼬드겨도 꿋꿋이 한인 마트에서 파는 대기업 김치를 추천해주었다. 나에게 김장은 요리의 신이나 어른들만 할 수 있는 경지의 무엇과도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김장하던 날은 마치 축제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동네에서 김치 맛이 좋기로 유명했던 나의 할머니는 매년 100포기 이상의 김치를 담갔다. 이웃과 사촌들이 모두 모였고 마당에는 빨간 대야와 맵싸한 향이 가득했다. “눈이 매우니 저리 가 있으라”라는 어른들의 말에 냉큼 달려나가 놀기에 바쁜 어린이들은 김장이 마무리될 때 즈음 부르는 소리에 달려가 잘 익은 수육에 약간의 김칫소를 올려서 한입 가득 먹었다. 모두가 김치통을 들고 돌아간 뒤 할머니 등에 파스를 몇 장 붙이고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정도가 김장 날 내가 한 일이었다.

이웃집에서 김장을 배우고 있는 필자.

이웃집에서 김장을 배우고 있는 필자.

나에게는 즐거운 김장 날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엄마에게는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점차 쇠약해지자 엄마는 김장 파업을 선언했다. 그날부터 우리 집 식탁은 온갖 대기업 그리고 홈쇼핑에서 파는 김치들로 채워졌고 자연스럽게 김치는 ‘사 먹는 것’이 되었다. 가끔 할머니 김치가 그립기도 했지만 요즘처럼 맛있는 게 흘러넘치는 세상에서 그 그리움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아부다비행이 결정되었을 때에도 “한국 음식 몇 년 안 먹으면 되지. 현지에 가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거야”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나였다. 그러나 타들어가는 날씨 때문인지, 고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김치가 그리도 생각이 났다. 특히 할머니가 담근 그 아삭하고 상큼한 김치말이다.

한인마트에 들르니 냉장고 한 칸에 대기업 김치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맛김치, 총각김치, 깍두기, 갓김치 등 없는 게 없다. 배추김치가 2㎏에 약 3만7000원으로 한국으로부터의 배송비를 생각하면 사악한 가격은 아니지만 아부다비까지 오는 길에 쉬이 익어버려 내가 원하는 맛의 김치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느 날은 할인가격에 덜컥 구매한 김치를 열어보니 혀가 찌릿거릴 정도로 시어터진 맛이 났다. 나는 김장을 배우러 가기로 결심했고 이 사실을 가장 좋아한 건 남편도, 아이들도 아닌 나보다 한식을 더 사랑하는 외국인 친구들이었다.

외국에서 김장이라니, 재료 수급부터 막막하게 느껴졌지만 이곳 UAE는 전 세계의 물건이 흐르는 곳이라 마음먹고 찾아보니 없는 게 없는 마술 보따리였다.

김치의 핵심인 배추는 한국에서 항공으로 수배해온 해남 배추가 으뜸이지만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제철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이란이나 중국산 배추를 사용한다. 배추의 영문명이 ‘Chinese Cabbages’로 불리는 걸 영 꺼림칙해하며 집어든 중국산 배추는 1㎏에 약 2000원, 이란산 배추는 4000원꼴이었다. 한 번씩 열리는 세일 기간에는 1㎏에 600원대에 구할 수도 있으니 가격은 중국산의 압도적인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산 배추에 비하면 어딘가 영 부실해보이는 외관이었지만 반으로 쪼개니 안쪽은 샛노란 게 익히면 맛이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아부다비 한인마트의 한국 김치 매대. 배추김치 2㎏에 한화 3만7000원 정도에 판매된다.

아부다비 한인마트의 한국 김치 매대. 배추김치 2㎏에 한화 3만7000원 정도에 판매된다.

아부다비에 와서 김장을 할 때 난관에 부딪히는 두 가지 식재료가 무와 배다. 동네 마트에서 파는 무는 ‘무다리’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로 가늘다. 그래도 무는 무이니까 비슷한 맛이 나겠지 하고 집어들어 비싼 소고기를 팍팍 넣고 뭇국을 끓였는데 아이들이 한입 먹자마자 우웩 소리를 내며 뱉어버렸다. 그 얇은 무는 한국 엄마들이 싫어하는 바람 든 무 그 자체였다. 한 번의 뼈아픈 실패 이후 무 근처에도 가지 않았건만 어느 날 중국 마트에서 발견한 두바이산 무가 제법 씨알이 굵고 무거워보였다. 집에 가져와 잘라먹어보니 한국에서 먹던 알싸하고 달콤한 무 맛과 흡사했다. 세상에 두바이에서 무 재배가 가능하다니, 거기다 이렇게 맛도 괜찮다니 그 비결이 궁금했다.

UAE에서 위마트(Wemart)로 알려진 웽차오(Wenchao) 그룹은 2006년 두바이의 작은 슈퍼마켓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현재는 가장 유명한 아시안 마켓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채소를 많이 먹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두바이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50㎞ 떨어진 나즈와 사막에 농장을 지었다. 사막을 깊게 파서 관개용 지하수를 추출하고 유기재배를 하기 위해 비료에 낙타의 변을 섞어 쓰는 등의 피나는 노력으로 광활한 사막에서 유기농 농장을 일궈냈다. UAE 정부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인 ‘지속 가능한 발전’ 그리고 ‘산업 다각화’에 맞물려 그들은 일약 스타가 되었고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매장에 대문짝만 하게 걸린 반 전 총장의 사진을 보면 그들이 이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짐작이 간다. 그 덕분에 나는 사막나라에서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청경채나 열무 등의 신선한 채소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할랄인증을 받은 한국산 배가 두바이를 통해 수입되기 시작했다. 노랗고 호리병처럼 생긴 서양 배를 맛보면 이게 왜 ‘배’인지 의아한 마음이 들 정도인 반면 달콤하고 아삭한 맛에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한국 배는 당연히 이곳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다. 1㎏에 무려 3만원이 넘는 가격이니 말이다. 한국산 배를 김치에 넣자니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요, 그렇다고 안 넣자니 김치의 감칠맛이 사그라들까 걱정된다면 갈증해소에 유명한 바로 그 배 음료를 대신해서 넣는 방법이 있다. 배 음료는 한국 마트 어디서나 구할 수 있기도 하고 가격도 한 캔에 1600원꼴이니 이만한 대용품이 없다.

이란산 배추, 두바이산 무, 한국산 태양초 고춧가루, 네덜란드산 소금, 인도산 생강, 태국산 액젓 등이 어우러져 완성된 김치.

이란산 배추, 두바이산 무, 한국산 태양초 고춧가루, 네덜란드산 소금, 인도산 생강, 태국산 액젓 등이 어우러져 완성된 김치.

집에 돌아와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장보는 데 5만원 정도가 들었다. 고춧가루는 한국에서 공수해온 것으로 쓴 덕에 가격에 반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치 한 포기 사 먹는 가격에 두세 포기를 얻었으니 역시 노동력을 들여 직접 담가 먹는 게 가계에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아부다비는 양파, 고구마, 감자 등 주식이 될 수 있는 채소의 가격이 저렴하다. ㎏당 감자는 1300원꼴인 경우가 허다하고 양배추는 500원대, 자색양파는 1200원에 판매되고 있다. UAE에서 가장 인기 좋은 육류인 닭고기는 7000~8000원 선이다. 전 세계가 식량 공급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 시기에도 비교적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하는 데에는 역시 오일머니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UAE는 먹거리 가격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식품 거래 기업들의 지분 확보를 통해 시장의 주도권을 쥐었다. 또한 최대 공급처인 인도로부터의 수출입을 보장받기 위해 인도·UAE 간 전용 물류 인프라를 구축하기도 했다. 올여름 인도의 쌀 생산량이 급감하며 수출을 금지한다는 소식에 국민들의 동요가 일자 UAE 정부는 쌀 수급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그들을 안심시켰다. 이밖에도 정부가 정한 필수 품목들의 소비자가를 인상하고자 한다면 그 원인을 정부에 소명해서 허가를 받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만약 허가 없이 가격 인상을 감행하면 법적 처벌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정부가 기초 생필품 가격을 안정시키려 이토록 노력하는 이유는 UAE의 발전을 뒷받침하고 있는 90%의 외국인 노동자들 주머니 사정 때문이다. 이들의 월급이 평균 80만~100만원대라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40만~50만원을 받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그중 반을 본국의 가족들에게 보내고 10만원가량을 주거비로 사용하면 한 달 생활비로 쓸 수 있는 금액은 약 10만원꼴이다. 따라서 생필품의 가격은 최소로 유지하되 시장의 성장을 이끌 수 있는 품목에는 자유롭게 가격을 책정하도록 투트랙 정책을 펴고 있다.

그리하여 김장을 위해 모인 재료는 이란산 배, 두바이산 무, 한국산 태양초 고춧가루, 네덜란드산 소금, 인도산 생강, 태국산 액젓 등이었다. 이 재료들로 김칫소를 만들고 하나하나 배춧잎에 묻혀가며 과연 이 김치를 어디 산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추가 이란산이니 이란 김치인가? 담그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니 한국 김치인가? 아니면 담그는 지역이 아부다비이니 아부다비 김치인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나의 첫 김장 도전은 끝이 났다.

이웃에게 배워뒀던 덕일까. 완성된 김치는 반나절 실온에 두니 알싸하고 그럴듯한 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각각 다른 말소리를 듣고 자란 재료들로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어느새 근사한 요리가 되었다. 이 국적불명의 김치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내가 사는 이곳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두루두루 지내면서 서로를 배우고 이해하며 무르익어 가는 곳. 여기는 아부다비이다.



[다른 삶]중동에서 김장이라니…이란 배추·두바이 무·한국 고춧가루로 김치 완성


조혜임

국내외 기업에서 커뮤니케이터로 일했다. 현재는 남편, 쌍둥이 딸과 아랍에미리트연합에 거주하며 현지의 일상을 글과 그림에 담아 소셜 플랫폼에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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