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얼죽아’…중동에는 보약 같은 ‘뜨죽아’가 있다

2023.12.01 16:08 입력 2023.12.01 16:13 수정
조혜임

아라비안 라이프 | 오묘한 아랍의 커피 문화

아랍 현지인들은 더운 날씨에도 뜨거운 아랍 커피를 즐긴다. UAE의 호텔이나 이벤트 등의 리셉션에는 어김없이 환대의 의미를 담은 커피와 대추야자가 놓여있다.

아랍 현지인들은 더운 날씨에도 뜨거운 아랍 커피를 즐긴다. UAE의 호텔이나 이벤트 등의 리셉션에는 어김없이 환대의 의미를 담은 커피와 대추야자가 놓여있다.

아랍의 호텔에 들어서면 금테를 두른 작은 손수레나 탁자에 황금빛 주전자 달라(Dallah)와 작은 잔인 핀잔(finjan)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함께 자리한 유리그릇에는 잘 익은 대추야자가 담겨있다. 아부다비에 거주하며 대추야자의 달콤 쫀득한 맛에 눈을 뜬 아이들은 그런 수레를 만날 때마다 참새 방앗간 들르듯 쪼르르 달려가 하나씩 집어 먹곤 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대추야자를 향해 돌진한 아이들과 그 뒤를 따르는 나를 멀리서 지켜보던 한 호텔 직원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친절한 얼굴로 주전자를 가리키며 아랍식 커피를 마셔보겠냐 물었다.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주전자를 들어 소주잔만 한 작은 잔에 쪼르륵 커피를 따랐다.

‘무슨 맛일까? 여기 사람들은 꿀을 좋아하니 달콤하고 향긋한 맛일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잔을 코에 갖다대자 순식간에 경동시장 한가운데로 소환된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엄마의 잔소리에 코를 틀어막고 입에 욱여넣었던 한약과 비슷한 냄새에 몇 초간 머뭇거렸지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직원의 눈치에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야 말았다. 커피 특유의 고소함과 달콤함은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세상에 이게 커피라고???’

삶의 활력소인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원조가 이 노란 아랍 커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랍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한 책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에서 커피는 6세기경 아프리카와 아랍지역을 통치하던 악숨왕국에 의해 에티오피아에서 예멘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기후와 토양이 적합했던 예멘은 그 일대 최고의 커피 생산지로 변모했다. 우리에게 커피의 한 종류로 알려진 Mocha(모카)가 실은 예멘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실어 날랐던 홍해 연안의 항구도시 이름인 것만 보아도 당시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Coffee’의 어원 또한 아랍어 ‘Qahwa(까흐와)’에서 비롯되었으니 커피의 역사를 논하는 데 있어 아랍 세계의 역할을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커피가 확산된 이유 또한 고된 수행을 하는 이슬람교도들이 잠을 깨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면서부터라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삶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자양 강장제로서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아랍 커피는 아라비카 원두를 약하게 볶기에 이렇게 옅은 색을 띠게 된다. 볶은 커피 가루를 미세하게 분쇄하여 그대로 구리로 된 주전자에 넣고 끓이며 추후에 각종 향신료로 향을 낸다. UAE에서 주로 맛볼 수 있는 아랍 커피는 에미라티 블렌드(Emirati blend)라고 불리며 향신료의 여왕인 카다멈(Cardamom, 생강과의 향신료)과 금과 가격이 맞먹는다는 사프란(Saffraan)이 첨가된다. 옆나라 사우디아라비아 블렌드에는 정향이 가미되기도 하며 개인의 취향에 따라 로즈 워터 등을 추가하기도 하지만 터키 커피처럼 설탕을 넣지 않고 달콤한 대추야자를 함께 내간다. 첨가되는 향신료는 기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모든 아랍 커피에는 환대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예부터 사막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베두인(UAE 사람들의 선조)들은 손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 첫 번째 대접이 바로 이 커피였다. 혹독한 사막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내어주는 따뜻한 커피 한잔과 대추야자는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었으리라. 자신 또한 그러한 환경에 처했을 때를 떠올리며 서로를 돕고 공생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 지금까지 정신적인 유산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 및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이 기록된 하디스에서도 손님을 맞이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중히 여기고 있다.

약하게 볶은 아라비카 원두에
사프란 등 향신료 넣고 끓여
설탕 안 넣고 대추야자와 마셔

유목생활 베두인은 손님 환대
‘마즐리스’ 문화로 계속 이어져
잔은 오른손만 사용 에티켓도

아랍 커피는 아라비카 원두를 약하게 볶기에 옅은색을 띤다.

아랍 커피는 아라비카 원두를 약하게 볶기에 옅은색을 띤다.

이러한 이유로 UAE의 호텔이나 이벤트 등의 리셉션에는 늘 커피와 대추야자가 놓여있다. 아랍 커피의 색다른 맛에 놀라 이후로는 근처도 가지 않는 나와는 다르게 남편은 대추야자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 꼭 한잔을 얻어 마시고 온다. ‘공짜라면 양잿물이라도 먹는다더니…’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 그윽한 표정으로 콧구멍을 마구 벌름거리며 또 한잔을 따라 마신다.

“그 커피 진짜 맛있어?”라고 물으면 그는 “응.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고 향이 좋은데”라고 답한다.

3년 전 아부다비에 왔던 남편 또한 처음 맛본 커피 맛에 무척이나 놀랐다고 했다. 그가 이 커피를 처음 접했던 것은 현지 회사와 미팅할 때였는데 첫 잔을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던 남편은 그들이 건네주는 커피를 호로록 비울 수밖에 없었다. 아부다비의 파트너 회사들은 이처럼 커피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는 이들의 오랜 전통인 마즐리스(Majlis) 문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즐리스는 손님방, 응접실 등의 장소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대규모 모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뱃일을 하던 UAE의 오랜 선조들은 보트 하나를 마즐리스 장소로 정한 뒤 거기에 모여 날씨에 관한 소식이나 낚시, 진주조개 잡이에 관한 어려움을 나누곤 했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 마즐리스는 사교적인 만남뿐 아니라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한 회의까지를 아우르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아부다비의 문화체험 장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빨갛고 금박이 박힌 소파와 카펫이 놓인 곳이 전통적인 마즐리스의 모습이다. 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에미라티 사회에서는 이곳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이 존재한다. 커피를 내가는 일은 나이가 어린 사람이 맡으며 왼손으로는 주전자를 들고 오른손에 잔을 들어 따른 후 제일 연장자부터 대접한다. 커피를 잔에 가득 따르지 않는 것 또한 예의 중 하나인데 이는 가급적 손님이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잔을 받는 사람도 물론 오른손만을 사용해야 한다. 커피를 더 원할 경우에는 잔을 살짝 앞으로 들어 흔드는데 만약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더라도 잔을 바닥에 내려놓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지니 손에 쥐고 있다가 잔을 회수할 때 전해주어야 한다.

마즐리스에는 누구나 초대될 수 있으니 UAE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에티켓을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첫 만남에서 남성들은 악수 혹은 가볍게 코를 비비거나 머리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하지만 여성에게 남성이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것은 크나큰 결례이다. 그러나 여성이 먼저 청할 경우에는 무방하니 아랍 사람들을 만날 때는 비언어적인 제스처에 주목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좋다. 마즐리스에서는 다리를 꼬아 발끝이 상대를 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다소 까다롭게 느껴지는 에티켓들 때문에 그들과 만나는 일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요즘 UAE의 젊은 세대들은 문화적 다양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혹여 의도치 않은 결례가 있더라도 이해하고 넘어가는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유일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주말 아침, 아이들을 한글학교에 보내고 잠깐의 여유를 어떻게 누릴까 하다가 남편 손에 이끌려 레바논 커피숍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니 다시 한번 아랍 커피에 도전해보자 싶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면 뒤로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꼰 채 한 손엔 커피와 다른 손엔 휴대전화를 들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아랍 커피 주전자 앞에서는 그러한 자세가 영 불편하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한 잔씩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꽃이 끊이질 않는다.

귀한 향신료가 들었으니 보약이다 생각하고 한입에 털어넣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 커피는 감성으로 마시는 것이라더니 분위기 좋은 곳에 와서 그런가 싶어 다시 한 잔을 음미해보았다. 생강의 알싸한 맛과 사프란의 풍미가 입안을 넘어 코끝에까지 감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 한가운데, 머리 위엔 쏟아져 내릴 듯한 은하수가 펼쳐지고 모닥불을 앞에 두고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차가운 바람이 부는 사막의 밤을 견디는 베두인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우리가 삶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소주 한잔을 기울이듯 그들에게는 이 커피 한잔이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을 터이니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삶]한국은 ‘얼죽아’…중동에는 보약 같은 ‘뜨죽아’가 있다


조혜임

국내외 기업에서 커뮤니케이터로 일했다. 현재는 남편, 쌍둥이 딸과 아랍에미리트연합에 거주하며 현지의 일상을 글과 그림에 담아 소셜 플랫폼에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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