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벌주의의 속내

2013.02.12 21:24
남재일 | 경북대 교수·신문방송학

교과부가 지난해 처음으로 전수조사한 초·중·고생들의 정신건강 결과가 8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됐다. 668만명 중 지속적인 관심과 관리가 필요한 학생이 105만명, 자살충동 등 고위험군이 9만7000명에 달했다. 암담한 현실이다. 교과부가 학생 정신건강 전수조사를 실시한 것은 학교폭력에 대한 근본적 대책 마련을 위해서였다. 학생 정신건강을 개선하는 길이 궁극적으로 학교폭력의 근본적 대책이라는 생각으로 실태조사를 하게 된 거다. 전수조사의 방법과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지만, 적어도 학교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정신건강 개선으로 전제한 것은 올바른 방향 설정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같은 날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로 2012년 학교폭력으로 구속된 학생수가 2011년의 3배라는 사실이 보도됐다. 교과부가 학생 정신건강 실태를 조사하고 있는 사이, 경찰은 부지런히 폭력 학생들을 구속한 게다. 이런 상황이 어떻게 가능할까? 학교폭력에 대한 정부의 정책기조가 계도와 정신건강 개선으로 가닥이 잡혔다면 당연히 형사처벌은 줄이는 게 맞다. 구속해서 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이 가해학생 계도와 학생 전체의 정신건강 개선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로 갔다. 처벌은 늘었고 정신건강 개선을 위한 교과부의 조치는 우왕좌왕하고 있다.

[경향논단]엄벌주의의 속내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엄벌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맹신이 있지 않나 싶다. 엄벌주의는 처벌의 강화가 범죄를 예방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 믿음이 환상에 가깝다는 사실은 여러 실증적 자료들이 입증한다. 사형제도는 강력범죄 예방효과가 미미하고, 성폭행에 대한 처벌 강화가 예방을 보증하진 않는다. 범죄예방은 범죄를 발생시키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지속적인 개선과 관리가 중요하다. 그럼에도 엄벌주의에 대한 맹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할 듯하다.

첫째, 엄벌주의는 범죄로 인한 대중의 불안을 달래주고 범죄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책임 분담을 면해 준다. 살인범에 대한 비분강개는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심, 피해자에 대한 동정과 정의감, 나는 저 범죄에 대해 사회적 책임이 없다는 방어적 태도가 얽혀 있다. 사형은 이 모든 사정을 해결해준다. 엄벌주의를 통해 대중은 내 삶은 안전하고, 나는 선량하며, 저 범죄에 대해 지불해야 할 사회적 부채가 없다는 마음 상태를 얻는다. 가해학생만 처벌하면 학교폭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학부모의 환상은 학교폭력의 뿌리인 입시를 위한 과도한 경쟁과 인성교육 부재라는 현실에 자신이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해주는 것이다.

둘째, 엄벌주의는 국가기구가 범죄를 다루는 가장 값싼 정책이다. 폭력 학생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돈이 별로 안 든다. 계도를 위한 사회적 지원은 금전적·정서적 비용이 엄청나게 든다. 재원을 마련하려면 세금을 거둬야 한다. 조세제도가 제대로 된 국가라면 범죄예방을 위한 재원은 수혜 폭이 큰 부자들 호주머니에서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이게 싫어서 범죄자를 그냥 감옥에 가두어 두면, 더 노련한 범죄자가 돼서 사회에 나오게 된다. 재범의 피해는 누가 보는가? 성폭행 피해는 여성들이 볼 것이고, 살인 피해자도 대부분 여성들이다. 폭력 피해자도 사회적 약자들이 주로 본다. 사회경제적 강자들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엄벌주의는 윤리적 판단도, 정책적 판단도 아닌 사회적 강자의 이익에 충실한 정치적 판단에 가깝다.

한마디로, 엄벌주의는 범죄에 대한 사회적 책임 분담을 회피하는 대중과 경제적 비용 분담을 거부하는 국가가 만날 때 가장 요란한 소리를 낸다. 사회에 대한 대중의 거짓 관심과 국가의 무능이 조우한 결과다. 성숙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범죄를 대면하는 태도는 피해자에 대한 배려와 예방을 위한 사회적 지원의 확대다. 특히 그 범죄가 청소년들의 순간적 일탈인 학교폭력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가해학생에 대한 처벌만 도드라진 현재의 엄벌주의는 학교폭력에 대한 사실상의 방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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