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정치

2013.07.04 21:11 입력 2013.07.04 23:30 수정
정희진 | 여성학 강사

글자 그대로라면 호색한(好色漢)은 색깔을 좋아하는 예술가고 색골(色骨)은 컬러 뼈다귀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색(色)만큼 다양한 의미와 비유가 가능한 글자도 드물다. 성(性), 캐릭터, 입장, 종류, 정치학, 특성, 건강 상태까지 표현 가능한 다채로운 언어다. 적자(赤字), 적나라(赤裸裸), 적빈(赤貧·몹시 가난함), 청신호(靑信號), 홍일점(紅一點), 상록수(常綠樹), 회색인(灰色人)…. 색깔은 색깔을 떠나 사회를 설명한다.

뭐니뭐니 해도 정치색을 따라갈 수 없으리라. 주지하다시피 검은색은 주로 ‘협박(blackmail)’ ‘속이 시꺼먼 놈’ 등 부정적인 의미다. 반대로 흰색은 ‘깨끗함’, ‘숨김 없음(백서·white paper)’을 과시한다. 일제시대 일경은 독립운동가나 사회주의자를 색출(索出, ‘色出’)하는 데 과일을 은어로 썼다. 수박과 사과를 구별하는 일이다. 겉은 파란데 속은 빨간 수박은 마르크스주의자, 겉은 붉은색이나 과육은 하얀 사과는 폼만 잡는 모던 보이다. 여기에는 빨강, 파랑, 하양의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는 미국에서 백인 행세를 하는 아시아 사람을 가리킨다.

[정희진의 낯선사이]색의 정치

물론, 압권은 ‘빨갱이’다. 지겹지만 영원한 유통기한을 자랑한다. 국정원이 국가 간 정보가 아니라 국민 정보를 캐고 현실 정치에 개입해 인터넷 댓글이나 달고 있다. 지금 이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운데, 이와 관련해 지난달 27일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김을동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 마누라가 ‘빨갱이’다 보니 다 헝클어졌다”고 말했다.

이는 김 의원의 발언 목적과는 다르게, ‘빨갱이’의 개념이 무엇이고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와 무관하다.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현상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빨간 렌즈를 썼으니 상대가 빨갛게 보이는 것이다. 흑백 논리와 레드 콤플렉스 대신, 자기 색깔이 있으면서도 다른 색깔과 친구하는 무지개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것은 ‘빨갱이’ 담론으로 막대한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해 대선 때 동네에 새빨간 단체복을 아래위로 맞춰 입은 수십명의 선거운동원들이 떼로 몰려다녀 시각적 피로와 두려움을 느꼈다. 유니폼을 입은 집단은 위화감을 조성하기 쉬운데, 그것이 빨간색일 때는 말할 것도 없다. 야당이나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은 감히 빨간옷을 입지 못한다. 새누리당은 색깔 선택의 자유가 무궁하나 야당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분홍색이나 주황색도 곤란할 것이다.

색깔 선택의 자유는 색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는 권력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내가 입으면 열정, 네가 입으면 빨갱이”인 문제가 아니다. 자기는 색깔이 없는 중립이어서 아무 색이나 어울리지만(?), 다른 사람은 자기가 지정한 색을 입어야 하고 이를 법적·문화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몇 년 전 캐나다에서 여성주의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접수대의 백인 여성이 나더러 “유색 인종(color of people)은 당신 혼자”라고 말했다. 내 나라에서는 빨간색, 남의 나라에서는 피부색이 문제였다. 그녀의 태도나 어감은 환영한다는 의미였지만, 나는 흥분했다. “흰색은 색깔이 아니니? 내가 유색이면 너도 유색이야. 무슨 근거로 흰색이 기준이야? 백인 말고는 다 유색이야? 그리고 흰색이 나쁜 의미인 거 몰라? 1차 대전 때 동유럽 지주들 백색동맹 몰라? 우익 테러를 백색 테러라고 하는 거 몰라?” 나의 서툰 영어에다 급작스러운 인식론적 공격에 세계사까지 운운한 때문인지,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나 혼자 씩씩거렸다.

색깔론은 영원할 것이다. 비유의 전제인 색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색깔론의 영향을 덜 받는 시민의 각성과 ‘빨강-보수’ ‘녹색-북한’식으로 기호 체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사회도 있다. 드루즈(Druze)는 이슬람교의 한 분파인데 상징물 중 하나인 별은 5가지 색깔(녹·적·황·청·백)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개념과 다르다. 녹색은 정신, 적색은 영혼, 노란색은 말씀, 청색은 의지, 백색은 의지의 실현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색인은 없다. 누구나 성깔이든 정치적 입장이든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기호이지(“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타인이 내가 좋아하거나 지향하는 색을 규정할 수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원권,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다. ‘빨갱이’라는 손짓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

한편, 흥미롭게도 색은 실제로는 배타적이지 않다. 연속적, 상호의존적이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빨주노초파남보가 같은 색의 엷은 변화이기 때문이다(레인보 깃발은 동성애 문화의 상징). 빨강에서 시작하지만 파랑으로 끝나면서 보라색으로 다시 만난다. 마치 낮과 밤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을 거쳐 계속 순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