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부정문

2013.07.17 21:26 입력 2013.07.18 15:05 수정
신형철 | 문학평론가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금 한국의 문인들이 가장 많이 읽고 있는 책은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가 아닐까 싶다. 선생의 문명(文名)이 문단 바깥에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문단 안에서 그는 동시대 젊은 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평론가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후학들의 존경을 인위적으로 불러일으키려 하고, 또 그 존경을 가시적으로 확인하려 하고, 급기야 그 인위적 존경을 제도화하려 하는 어른들을 더러 보았지만, 선생의 경우 후학들의 자발적인 존경은 오로지 그의 글에만 힘입은 것이다.

선생의 글이 어떤 위력을 품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지만 간단히 하나만 말하자. 그의 글에서는 ‘~인 것은 아니다’나 ‘~라고 하기는 어렵다’와 같은 식의 부정문들을 자주 보게 된다. 자연과학 쪽에서는 어떤 위대한 발견에다 최초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를 흉내내보자면 나는 저와 같은 유형의 부정문을 ‘황현산 부정문’이라고 부르고 싶기까지 하다. 그가 이런 문형의 최초 사용자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한국어의 저 문형에 남다른 리듬과 어감을 부여한 사람이 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화와 삶]황현산의 부정문

그는 결론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와중에 저 특유의 부분 부정문들을 곳곳에 심는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적병을 하나씩 죽여 나가는 식으로가 아니라, 강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징검돌을 하나씩 놓는 식으로 그렇게 한다. ‘당신은 틀렸다’고 말하는 부정문이 아니라 ‘당신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부정문으로, 전래동화에서처럼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드는 것이라는 듯이, 세상의 힘센 주장들에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준다. 이것은 부정을 확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부정하기 위한 부정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결론의 한 사례. “내가 생각하는 바의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돼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 작은 승리 속에 큰 것의 패배가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마지막 문장은 단호하지만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단호하지는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단호함이다. 단호한 승리도 단호한 실패도 없다. 오로지 그렇다는 사실만이 단호할 것이다. 이것은 노회함도 유약함도 아니다. 늘 어떤 주장의 일면성을 지적하면서 이면을 가리켜 보여주되, 자신의 지적 자체도 일면적인 것일 수 있음을 동시에 의식하는 의식. 이것이 바로 ‘문학적 의식’의 한 본질일 것이다. 평론이 아니라 칼럼이 묶인 이번 책은, 그런 의미에서, 정치가나 과학자가 아니라 문학하는 이가 쓰는 칼럼이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강의실에서 선생의 강의를 듣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나는 선생의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한 다리 건너 전해 듣는 선생의 인품에서도 배운다. 최근 사례 하나. 소소하지만 황송한 인연이 있어 선생께서 서명한 책을 받을 수 있었는데, 선생은 책의 속지에다 서명을 하지 않고, 따로 작은 메모지에 서명을 해서 그것을 테이프로 붙여 보내셨다. 이 특이한 조치의 속뜻이 짐작되지 않아서 알만한 이에게 물어보니, 당신의 ‘졸저’를 다 읽으면 서명 쪽지를 떼어버리고 중고서점에 팔라는 뜻으로 한 배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뜻만은 거역해야겠다. 선생의 책제목 그대로 “밤이 선생”이라면, 그는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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