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들을 찾아서

2013.12.13 20:26
김영민 | 철학자

자식이 부모를 빼닮은 데를 가만히 보노라면 참 신통하다. 그게 아무리 당연해도 신통한 것은 여전하다. ‘나는, 내 생김새는 유니크(unique) 해!’라고 희떱게 구는 꼴을 (전문 용어로) ‘허영’이라고 하지만, 알다시피 이는 오래가는 짓이 못된다.

[사유와 성찰]얼굴들을 찾아서

그래서 조상과 이웃을 길고 널리 아는 일은 사람의 인품을 닦는 데에도 유익하다. 유니크하진 못해도 개인의 얼굴은 각각 세월을 겪고, 제 행위를 거치면서 달라진다. 그래서 얼굴만큼 싱싱한 아이덴티티도 없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자본주의적 미학이 돌이킬 수 없이 개입한다. 특히 우리같이 ‘외모 지상주의’를 구가하는 사회에서는 다만 몸맨두리나 얼굴생김만으로 떼를 지어 복대기를 친다. 사람의 욕망이란 워낙 변덕이 심해, 한 우물을 파면서 끝장을 보지 못하고 늘 이런저런 ‘모델’들을 따르는 것에서 스스로 피폐해 간다. 성형 열풍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아무도 ‘아름다움’ 그 자체에는 천착(鑿)하는 일도 없이 ‘누구의 코’와 ‘누구의 턱’으로 귀착(着)하고 마는 것이다. 과연 도시자본주의의 대세는 바로 이 모델(욕망의 중간매개)의 산업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개성이라는 환영의 손오공들이 모짝 시장이라는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서 허둥지둥대듯이, 얼굴생김들도 자본의 열락(悅樂) 속에서 차츰 결국 서로 닮아갈 뿐이다. 그러나 각박한 체계 속에서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영혼을 키워나가는 게 인간인 것처럼, 사람의 얼굴도 허영과 모방의 틈새를 뚫어 내면서 제 자신의 모습을 키워나가는 법이다.

그래서 ‘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법’(成於中形於外)이며, 못생긴 링컨도 ‘나이 마흔을 넘기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고 단언했던 것!

따라서 삶의 이력은 고스란히 제 얼굴에 나타나며, 눈밝은 이들은 이를 신통하게 알아본다. 물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격언은 합리적이고, 나 역시 학생들에게 ‘타인의 외모를 말하지 말 것’을 이르곤 한다. 그렇지만, 합리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이치들을 줍는 게 혜안(慧眼)이라면, 얼굴이야말로 바로 그 밭이 될 만 하다. 그래서 얼굴을 일러 ‘얼이 들어 있는 굴’이라고 하는 것이며, 사람의 슬기와 근기는 바로 이 얼의 자리를 잘 다지는 데 있는 것이다.

얼굴에 윤리가 개입하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윤리란 한 마디로 기존의 도덕적 시스템을 뒤집고 해체하는 ‘밝힘말(言明)’이다. (물론 그 윤리가 다시 도덕으로 굳어 가더라도 말이다.) 누구든 제 얼굴을 제가 환하게 아는 듯이 여기지만, 그렇다면 외려 윤리가 성립하지 못한다. 얼굴의 윤리학은, (때로는) 실없고 섣부르게 내뱉는 타인들의 품평 속에 외려 제 얼굴의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내 얼굴 속에서 내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인상과 표정, 그리고 이치들을 짚어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나는 그 작은 체험들을 통해 얻은 바가 적지 않았다. 얼굴의 윤리학은, 굳이 얼굴을 지니고 태어나서 살아가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 얼굴이라는 ‘장소’의 뜻을 되비추게 하고, 이로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근자에 고양이 다섯 마리와 친해지면서 그 각각의 얼굴에 드러나 있는 표정과 인상이 제 나름의 행태와 태도를 간직하고 있는 것에 역시 신통해 하고 있다. 그 삶의 양식과 품격이 그 얼굴에 맺히게 되는 이치는 단지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얼굴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고양이의 표정이든, 어느 집의 안방이든, 헛간의 분위기든, 혹은 그저 적바림을 하는 작은 수첩의 속장이든, 자신을 다스리고 주변에 응하면서 거듭 사용하는 그 모든 곳에서는 솜씨와 정성에 따라 ‘얼굴’이 솟아나게 되는 법이다.

결국, 인류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싸움의 중요한 한 갈래는 얼굴들의 생성에 있을 것이다. 어떤 얼굴들은 전통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또 어떤 얼굴들은 새로운 문화와 매체의 각광을 받으면서 등장한다. 긴 역사가 잘 일러주듯이 임의로 만들어 내세운 얼굴이란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얼굴들을 찾아가는 인류의 여정은 헛되지 않을 것이니, 대개 얼굴이란 가장 웅숭깊은 장소이며 가장 긴박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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