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100주년과 중동

2014.04.06 21:01 입력 2014.04.07 10:36 수정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올해는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중동 전역에서는 이를 특별하게 기념하는 의미있는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중동이 슬픈 약자로 전락하게 된 역사적 종착점이었고 반서구와 반외세의 강한 저항감이 두껍게 뿌리를 내린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전쟁은 천년이라는 긴 영광의 이슬람시대를 마감하고 모든 이슬람세계가 본격적으로 서구 식민지로 전락하는 뼈아픈 신호탄이기도 했다.

[국제칼럼]1차 세계대전 100주년과 중동

19세기까지 중동 지역 대부분은 오스만제국의 치하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제국은 불행히도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동맹국에 가담했다. 끝까지 중립을 지키지 못했던 것은 오랜 적국이던 러시아가 오스만 영토를 침략해 왔기 때문이다.

인도와 영국을 잇는 전쟁물자 생명선을 위협하던 오스만 터키를 꺾기 위해 영국은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결국 아랍민족을 회유하여 종교를 배반하고 같은 형제인 오스만제국의 등 뒤에 칼을 꽂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기독교 서구를 향해 이슬람의 지하드(성전)를 선포했던 아랍으로서는 ‘알라’를 배반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대가로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비밀조약’으로 전쟁 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국가의 독립을 보장해 주었다. 자주적 독립과 독자적 생존을 위해 종교적 신념을 버리는 운명적 선택을 했지만, 영국의 약속은 허구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비밀조약’으로 팔레스타인의 영국 지배를 합의하였고, 급기야 2000년간 아랍인들이 살아왔던 땅을 유대인에게 넘겨버렸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은 패전국이 되었다. 세 대륙을 석권했던 600년 대제국은 산산조각이 나고, 발칸반도에서도 손을 떼게 되었다. 코소보, 보스니아, 체첸 사태 등 발칸의 화약고 문제가 생긴 역사적 배경이다. 종교와 언어, 민족정체성을 공유했던 하나의 아랍 공동체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22개 아랍국가로 쪼개져 독립했다. 패전의 악몽은 터키 본토도 예외일 수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와 독립전쟁을 벌여 회복한 땅에 1923년 터키공화국을 세웠다. 1926년에는 이란도 독립하고 1948년에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주도로 2000년간 팔레스타인 아랍인 삶의 터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오늘날 아랍 22개국과 터키, 이란, 이스라엘 등 중동 25개 국가가 형성되었던 짤막한 중동 현대사의 단면이다.

100년이 지난 오늘 중동은 1차 세계대전을 성찰하고 초라한 패자로서 자신들의 험난한 미래를 조심스럽게 재설정하고 있다. 이라크와 이란이 8년간 전쟁을 했고, 1991년 1차 걸프전쟁 때도,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시에도, 아프가니스탄 공격에서도 중동-아랍국가들은 서로가 적이 되어 군대를 보내 형제들끼리 싸웠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이슬람권끼리 온전히 두 패로 나눠져 각각의 편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민주화를 쟁취한 튀니지, 예멘, 리비아 등지에서도 형제끼리의 내전은 일상화되었고,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할 수만 있다면 견원지간이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서로 협력할 수도 있는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다.

재스민 혁명과 아랍민주화 시위 3년이 주는 교훈도 이슬람의 정치적 이념보다도 민생의 문제가 훨씬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문제 때문에 무능한 야당보다는 부패한 집권당을 선택한 최근 터키의 선거결과나 민선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찬탈한 이집트 군부 쿠데타 주역 시시 장군의 대통령 출마 선언에 지지율 70% 이상을 보이는 이집트 상황도 결국은 삶의 안정이 본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 리더십이 종교적 이념이나 정치적 테러를 극복하고 사람의 삶 속에 깊숙이 뿌리내릴 때 비로소 희망적 100년이 보일 것이라는 한 회의 참석자의 결론이 귓전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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