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의 ‘국민 그룹’

2014.07.01 20:39 입력 2014.07.01 20:46 수정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지. 기방을 드나드는 왈자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지.”

신광수(1712~1775)의 <석북집>이 전하는 시의 구절이다. 이 시를 보면 이세춘이라는 가수는 18세기 조선의 국민가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세춘은 지금까지 통용되는 시조(時調·시절가요의 줄임말)를 만든 가수이기도 하다. 당대의 유행가요라 할 수 있는 ‘시조’는 기존의 노래를 뜻하는 ‘고조(古調)’와 구별되는 개념이었다. 한마디로 이세춘은 기존의 노래법과 전혀 다른 장르를 선보인 가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세춘은 ‘솔로’라기보다는 ‘그룹 밴드’의 리드보컬이었다는 것이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18세기 조선의 ‘국민 그룹’

그는 여성 가객들인 기생 계섬·추월·매월 및 ‘거문고’ 김철석 등과 일종의 밴드를 이뤄 각종 공연에 나섰다. 심노숭의 <효전산고>는 “계섬이 노래할 때는 마음이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짜랑짜랑 울려퍼졌다”고 한다. 훗날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 오프닝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의 여성 보컬인 추월은 가무(歌舞)와 자색(姿色)으로 유명한 ‘얼짱 댄스가수’였다. 매월은 종친(이익정)의 가희(歌姬)였고, 거문고잡이 김철석은 ‘철돌’이라는 예명으로 조선의 거문고계를 주름잡았다.

당대 최고의 이세춘 밴드가 평양감사의 회갑연에서 펼친 ‘대동강 깜짝 공연’(1765년 혹은 1766년)은 최고의 이슈였다(그림은 김홍도의 ‘평양감사향연도’). 이들은 평안도의 내로라하는 명가객들이 총출동한다는 소식에 “한번 실컷 놀아보자”고 의기투합했다. 평양에 잠입한 이세춘 밴드는 능라도와 부벽정 사이에 쪽배를 띄우고 장막을 펼쳤다. 이윽고 회갑연이 시작되자 평안도 밴드의 공연이 이뤄졌다. 그러자 쪽배 장막 뒤에서 이세춘 밴드가 똑같은 레퍼토리로 연주를 했다. 말하자면 같은 곡으로 ‘공연배틀’을 벌인 것이다. 인산인해를 이룬 대동강변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승리는 최신 음악과 춤, 그리고 화려한 화장법을 선보인 이세춘 밴드의 것이었다. “서도(평안도)의 가무와 분대(화장법)가 무색해졌다”는 평이 나왔다. 평양시민들은 뜻밖에 조선 최고 밴드의 음악을 만끽했다. 평양감사는 이세춘 밴드에 1만금에 달하는 돈(개런티)을 건네주었다(<이조한문단편집>). 참으로 낭만을 즐길 줄 아는 그룹밴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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