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다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그 이유가 제각각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베스트셀러 <총, 균, 쇠>에 인용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성공(행복)을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을 모두 갖추어야 하므로, 성공한 사람은 다 비슷해 보인다. 속된 말로, 능력 있고, 성실하고, 잘생기고, 부모 잘 만나고, 운도 좋아야 한다. 반대로,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실패(불행)하기 십상이니, 실패의 이유는 제각각이다.
안나 카레니나 법칙을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렵다’는 뜻으로 비약하지는 않겠다. 다만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기 위한 전략을 구상할 때 명심해야 할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즉 하나의 근본적 원인을 지적하면서 하나의 만병통치약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 다른 원인(들)을 악화시킬 수 있고, 그러면 더 깊은 실패의 수렁에 빠져들 뿐이다.
한국 금융산업은 곳곳에서 실패하고 있다. 최근의 예만 보더라도 저축은행의 줄도산, 동양그룹의 사기행각, 개인정보 대량유출, KB금융의 집안싸움 등등 상식을 넘는 사고들이 줄을 이었다. 최근 경제개혁연대의 한 멤버가 홍콩·싱가포르의 기관투자가 40여곳을 만나고 왔는데, 한결같이 “한국의 금융회사에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더라는 말을 전해 듣고,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물론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모피아의 관치금융과 낙하산 인사가 한국 금융산업의 총체적 실패를 낳은 핵심적 요인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그렇게 주장했다. 그런데 관치와 낙하산이 아무리 중요한 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근절’하고 ‘척결’하는 방식으로 한국 금융산업의 융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안나 카레니나 법칙을 환기해보자. 만병통치약은 예기치 않은 후유증을 낳고, 더 큰 질병을 불러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겠다.
우선 KB 사태의 책임을 물어 임영록 전 회장과 이건호 전 행장을 제재하는 과정에서 금융감독 당국이 심하게 오락가락했다. 금감원이 중징계인 문책경고를 통보했는데, 제재심의위원회에서 경징계인 주의적경고로 경감되었고, 그럼에도 금감원은 다시 문책경고로 올렸고, 금융위는 한 단계 더 높은 직무정지를 결정했다. 비난이 빗발쳤다. 대안의 하나로 감독당국에서 제재권을 분리하여 별도의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제재권이 없는 감독당국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직관적 해법이 언제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제재심의위원회의 결정을 금감원장이 번복했다는 게 잘못이 아니다. 제재심의위원회는 어디까지나 자문기구일 뿐이고, 최종 결정권자는 금감원장이다. 문제는, 금감원장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근거를 투명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제재는 (준)사법 기능인 만큼 사법절차에 준하는 투명한 절차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한편 지주사 회장과 자은행 행장 간의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KB 사태의 경우 출신 배경이 다른 두 낙하산이 내려옴으로써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러나 낙하산만 근절하면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우리나라의 금융지주사는 자은행의 주식 100%를 보유하고 있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사실상 하나의 조직이다. 하나의 조직에 두 개의 의사결정기구를 두는 우리나라의 금융지주회사제도하에서, 즉 지주사와 자은행에 각기 CEO·사외이사·감사위원회를 다 따로 두는 상황에서 갈등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지주사의 권한을 약화시켜 자은행의 자율성을 제고하자는 주장도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이럴 거면 지주사는 왜 만드나? 내부인사 아니면 몽땅 낙하산이라는 노조의 주장도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회사가 그렇게 망가지는 동안 노조를 비롯한 내부 구성원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한국 금융산업의 실패 원인은 다양하고, 하나의 처방으로 치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11월21일 KB금융의 임시주총에 가려고 한다. 무슨 해법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이사회가 회장 후보를 뽑을 자격이 있는지, 회장 후보가 혁신과 통합의 능력을 갖고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간다. 끈질기게 묻고 투명하게 답하는 과정에서 해법이 발견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더디더라도 이게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