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 문재인’의 그림자

2015.02.17 19:05 입력 2015.02.17 19:25 수정
김봉선 출판국장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취임 후 처음으로 쓴맛을 봤다.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준 여부를 여론조사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가 무안만 당하고 말았다. 인준에 부정적인 여론으로 이 후보자의 자진사퇴나 새누리당의 강행처리 포기를 압박하려 한 모양이나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총리 임명동의안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국회의 책무다. 문 대표로선 정무감각 부재나 아마추어리즘을 노출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인준안이 결국 여야의 표 대결 끝에 불과 7표 차로 통과된 만큼 야당으로선 지도부의 대응 미숙이 더욱 아플 법하다.

[김봉선칼럼]‘젠틀 문재인’의 그림자

여론조사 제안을 제외하면 문 대표의 출발은 나쁘지 않다. 문 대표는 경선 승리의 일성으로 ‘박근혜 정부와의 전면전’을 내세웠다. 박정희 묘역 참배와 메시지는 엇갈렸지만, 존재감 부재에 허덕이던 야당 지지층의 마음을 움직이고, 반대 세력의 눈과 귀까지 끌어당겼다. 야당 지지자들에게는 패자로서 역대 최다인 1469만여표를 얻고도 승리를 날렸던 지난 대선의 악몽을 털어내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심었다. 인사에서도 철저한 ‘친노 배제’의 탕평책을 구사하고 있다. ‘통합’과 ‘민생’이 그를 따라다니는 단어들이다. 그사이 대선주자 지지율에서 선두로 나서고, 당의 지지율도 덩달아 상승하고 있다.

‘스윙 보터’ 50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50대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더 지지했으나 지금은 가장 많이 떠나가는 연령층이다. 그들은 문 대표의 변신 시도에 대해선 대부분 긍정 평가했다. 경선 과정에서 결기를 보여줬고, 승리 후엔 준비한 듯한 플랜을 풀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전망은 엇갈렸다. 야당의 변화를 견인하리라는 쪽과 종국엔 대권욕으로 초심을 잃을 것이라는 쪽이 있었다. 탕평 인사를 두고도 또 다른 계파 나눠 먹기로 보는 시선이 상존했다. 주문은 한 군데로 모였다. 문 대표의 행보는 결국 민생으로 귀착되어야 한다는 것, 이를 토대로 실질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평가는 지금부터다. 설 연휴가 지나면 컨벤션 효과는 수그러들 것이다. 문 대표는 어렵게 붙잡은 관심과 기대를 묶어내 무능한 야당의 이미지를 씻어내고 주권자의 신뢰를 얻어내는 수권정당의 면모를 갖춰나가야 한다. 박근혜 정권에서 마음이 떠나고도 야당에는 좀처럼 지지를 보내지 못하는 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큰 그림과 구체적 실천 계획을 보여주는 게 그 첩경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져도 여당 지지율은 견고한, 당·청 지지율의 ‘탈(脫)동조화’는 이명박 정부 이래 계속돼온 독특한 현상이다. 야당의 존재감 부재가 그 뿌리다.

당장 극소수 측근에게만 의존하는 독단적 정치를 끝내야 한다. 여론조사 제안과 같은 패착을 막는 길이다. 정책적으론 ‘반(反)민생’과의 전면전에 나서야 한다. 회의실에 새롭게 내건 ‘민생제일 경제정당’의 실천이다. 지금까지 야당은 그런 일에 너무도 무능하고, 무관심해 보였다. 계파 갈등 해소는 ‘친노 해체’를 선언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두고 내부의 치열한 정책대결을 유도함으로써 갈등의 차원을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적쇄신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이러한 노력은 ‘당을 살리고, 나를 죽이는’ 마음으로 이뤄져야 한다. 대선 도전은 당을 살려낸 뒤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물이어야 한다. 한결같이 당 대표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항목들이다.

그러한 과제들을 감안할 때 ‘여론조사 제안’이라는 패착은 그냥 봐 넘길 수 없다. 무엇보다 ‘젠틀 문재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지난 대선 때 보여준 ‘젠틀 문재인’은 지지층은 물론 반대자들에게까지도 욕먹지 않으려는 듯한 ‘신사연(紳士然)’이 요체였다. 필부필부에겐 덕목일지 모르나 ‘무능’과 ‘무소신’, ‘무결단’의 다른 이름으로 비치곤 했다. 이번에도 이완구 후보자에 대한 민심은 부정적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응당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담판을 짓든, 설득을 하든, 투쟁을 하든 돌파했어야 옳다. 아니라면, 처음부터 국회 절차대로 표 대결에 심혈을 기울였어야 한다. 실리도 명분도 없는, 어설픈 제안이 운신의 폭만 좁히고 말았다.

지도자는 숙고해 결정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자리다. 중대사를 여론조사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시도는 책임 회피다. 인준이 끝난 뒤 ‘국민의 뜻 배반’ 운운하는 건 무능을 감추려는 변명으로 들린다. 야당 대표는 소신이나 당론 관철을 위해 욕먹는 일을 두려워해선 안된다. 비판받고 검증받으면서 단련되고 성장한다. 혹여 대선을 염두에 두다 보니 알게 모르게 ‘젠틀 문재인’으로 회귀하는 건 아닌지 되짚어볼 일이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지도자는 없다. 특히 정치지형상 소수인 야당에는. 문재인도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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