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할인점, 카트, 소비자

2015.03.29 20:41 입력 2015.03.29 20:50 수정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1990년대 초반 수도권 신도시는 유통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주부들은 서울로 ‘장보기 원정’에 나서야 하는 형편이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1990년대 중·후반부터였다. 대형할인점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P씨가 주말 오후면 가족과 함께 대형할인점으로 쇼핑에 나선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별별시선]대형할인점, 카트, 소비자

주지하다시피 신도시 아파트의 실내는 거실 중심의 기존 평면 계획을 답습한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바깥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사정은 달랐다. 서울 신시가지의 아파트 단지는 외부의 이질적 요소와 어떤 식으로든 접촉할 수밖에 없는 도시 연속체의 일부였다. 반면 아파트 단지로 동질화된 신도시는 외부와는 가느다란 교통의 선들로 연결된 도시였다. 벌판 위에 짧은 기간에 건설된 터라, 도시 내부의 사회적 기능 상당수는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다. 대형할인점은 빠른 속도로 그 공백을 상업공간의 논리로 재편해냈다.

P씨를 비롯한 젊은 거주자들 상당수는 생애 처음으로 ‘내집’을 마련한 터라, 기존의 도시적 삶의 습속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거칠 것 없이 대형할인점을 향해 직진할 수 있었다. 물론 그곳으로 향하는 교통수단은 ‘자가용 승용차’였다. 실제로 1985년에는 55만대에 불과했던 자동차 등록대수가 신도시 입주가 마무리된 1995년에는 847만대를 기록했다. 신도시 거주자들은 이 마이카의 대열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들은 자가용 운전자를 위해 설계된 도시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첫 번째 중산층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착한 대형할인점 내부는 독특한 공간 질서를 지니고 있었다. 외견상 수많은 상품들이 거대한 창고 속에 쌓여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명료한 분류 체계에 따라 진열대에 배치되었고, 쇼핑객은 카트를 밀며 진열대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선택할 수 있었다. 다양한 가격대의 유사 상품들이 한군데에 자리를 잡고 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선택의 즐거움이 배가되기 마련이었다.

한편 위계가 사라진 이런 공간의 질서는 기존의 중산층이 추구하던 일상의 질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기도 했다. P씨는 과거에 ‘샘이 깊은 물’ 같은 잡지들을 통해 교양 중산층의 세계를 엿보곤 했다. 그때마다 그 잡지들이 다루는 세련된 안목과 고상한 취향의 목록에 본능에 가까운 질투심과 함께 동경의 시선을 보내곤 했다. 언젠가는 당도하리라 다짐했던 문화적인 교양의 신세계, P씨는 그 세계가 대형할인점 앞에서 처절하게 박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유통 자본이 전면화한 ‘박리다매’의 논리 앞에서, 문화적인 교양이란 진열대의 수많은 상품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은가.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런 변화를 두고 대중 소비 사회에 내재한 하향평준화의 결과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한때 ‘교양’의 품에 안겨 있던 ‘문화’는 이제 ‘서비스’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P씨는 철든 이후 줄곧 개인과 사회라는 개념의 격자 사이에 국민, 민족, 민중, 시민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의 렌즈를 차례대로 삽입해보며 자신과 세상의 거리를 가늠해보곤 했다. 그때마다 초점이 흐릿한 안경을 착용한 듯한 느낌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대형할인점에서 카트를 밀기 시작한 이후 달라졌다. P씨는 자신이 3저 호황을 거치며 성취한 세 가지 정체성, 즉 ‘베이비붐 세대의 중산층’ ‘신도시의 거주자’ ‘마이카의 운전자’라는 정체성을 ‘소비자-고객’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연스럽게 단일화할 수 있었다. 마치 종교에 귀의해 세례를 받고선 새로운 세상에 눈뜬 것만 같았다. 그것은 총천연색의 고해상도로 명료하게 욕망의 이해관계를 표시하는 세상이었다. P씨는 대형할인점과 카트의 조합이 완성해낸 소비의 민주주의야말로 자본주의가 선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품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그 시절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있다. 2015년이면 대형할인점이 수백개로 늘어나 전국 각지에서 고객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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