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신립(1546~1592)은…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다.”(류성룡)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사진)에서 충주전투에서 대패한 신립 장군을 두고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군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폄훼했다. 명나라 이여송은 “천혜의 요새지(조령)를 몰랐으니, 신립은 지모가 부족한 장수였다”고 촌평했다. 심지어 1801년(순조 원년) 탄금대를 지나던 다산 정약용은 “신립을 깨워 ‘왜 문(조령)을 열어 왜적을 받아들였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신립이 천혜의 요충지라던 조령(해발 642m) 대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대패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렇지만 궁금증에 생긴다. 조선의 종묘사직을 위기에 빠뜨린 책임을 신립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신립은 여진족의 침범을 막아낸 용장이었다(1583년). 그런데 <징비록>은 신립을 시종일관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신립은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이 있다.… 신립이 무사를 모집했지만 따라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신립 장군을 위한 변명

신립은 그리 용렬한 장수가 아니었다. 류성룡이 전쟁을 총지휘할 체찰사(류성룡)와 부체찰사(김응남) 등을 문신으로만 채우자 “무장인 내가 나서겠다”고 자청했을 뿐이다. 신립은 결국 오합지졸 8000명을 이끌고 나섰다. 하지만 2만여명의 왜적은 이미 조령 인근까지 접근해 있었다. 게다가 조령 주변에는 몇 군데 우회로가 있었다. 만약 조령만 막았다가 왜적이 우회라도 한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서울의 임금과 조정은 피할 틈도 없이 화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신립은 왜병이 꼭 거쳐가야 할 요로, 즉 충주(탄금대)에 병력을 집중한 것이 아닐까. ‘그 잘난’ 임금과 종묘사직을 위해 옥쇄를 결심한 것은 아닐까. 임진왜란 발발 1년여 전인 1591년 3월 <선조수정실록>을 보자. “(동인 정권이) 왜적의 침략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싸잡아 ‘세력을 잃은 서인들의 인심교란책동’이라 구별지어 배척했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임진왜란 발발의 원죄는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선조와, 그 시대 공론을 이끈 동인 정권에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서애는 ‘장수(신립)를 잘못 썼다’면서 “지금 후회한들 어쩌겠느냐만 훗날의 경계를 위해 기록한다”고 썼다. 서애는 신립을 ‘징비(懲毖)’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순간 한마디 해보자. ‘누구든 죄 없는 자가 신립에게 돌을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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