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 하셨습니까

2015.05.10 20:39
정지은 | 문화평론가

뉴욕타임스의 특집 기획기사가 화제다. ‘반짝이는 매니큐어에 숨겨진 네일 미용사들의 어두운 삶’이라는 제목으로 한인이 주도하는 뉴욕 네일살롱 업계의 각종 노동법 위반 사례, 인종차별 등을 다룬 것이다. 한국어를 포함해 4개 국어로 기사를 번역 게재한 뉴욕타임스의 꼼꼼함은 놀라웠지만 기사 내용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기사화되지 않았을 뿐, 해외에서 일자리를 구해본 사람이라면 ‘한인 업소는 웬만하면 피해라’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업소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한국인이 사장인 경우 그 나라의 일반적인 통상 임금 기준보다 임금이 낮으며, 팁을 다같이 나눠갖는 등 불리한 노동조건이 옵션으로 붙어 있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고 하니 말이다.

[별별시선]사인, 하셨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이 외국의 한인 업소에서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 최저임금 이상으로 시급을 받는 알바 노동자가 얼마나 될까? 아르바이트라 하더라도 근로계약서를 써야 하고, 노동법의 모든 내용이 똑같이 적용된다는 원칙을 알고 있는 사람은? 최소한 한국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노동자’(‘근로자’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 것도 한국만의 특징이다. 영어에는 노동자와 근로자를 구분하는 단어가 없다.)로 살기 위한 교육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고용주든 노동자든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근로계약서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오죽하면 한 지방노동청에서 ‘근로계약서 주고받기’ 운동을 하기 위한 업무 협약을 했을까.

한참 ‘열정 페이’가 논란이던 때 어떤 사장님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내가 일을 가르치는데 돈을 받는 대신 오히려 돈을 주고 있지 않으냐. 경험 쌓으면서 돈 받으면 됐지 뭘 그러느냐”는 당당한 항변이었다. 사회생활 초기에 자주 듣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뽑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일 가르쳐가며 돈까지 주는데 얼마나 고맙냐. 그러니 따지지 말고 열심히 해라”와 같은 논리였다. 솔직히 나는 그때만 해도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였을까, “누가 거저 주는 게 용돈이지, 자기 몸 골병 들어가며 버는 돈이 무슨 용돈이오? 남의 일 해주고 돈 받으면 임금이고, 일하는 사람한테는 일하는 사람의 권리가 있는 겁니다!”는 웹툰을 접하고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른다. 이 웹툰은 최규석 작가의 ‘송곳’으로, 책은 곧 나오고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다고 하니 무엇으로든 꼭 한번 보시길 권하고 싶다. 방영 중인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그려진다. 오랫동안 일해온 부잣집 고용인들은 새로운 회사와 계약하면서도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기는커녕 사인한 문서조차 받지 못했는데도 그냥 일한다. “(계약서) 한번 보자고 하면 이상한가?”, “새삼스럽게 계약서 내용을 거론한다면 요즘 힘들어서 딴 생각하는 건 아닌가 오해를 살 것 같아서요.” 상호 날인한 계약서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인데도 주인님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은 물론,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낯선 것이 바로 현실이다.

나 역시 그동안 꽤 다양한 종류의 일을 해봤지만 제대로 된 계약서를 쓴 적은 거의 없었고, 20년 가까운 공식 교육과정 동안 노동과 관련한 교육은 전혀 받은 바 없다. ‘송곳’이 포털에 연재될 때 댓글에 노동상담소가 차려졌다는 이야기는 빈말이 아니다. 요새는 좀 나아져서 근로계약서 작성법, 최저임금, 노동시간, 주휴수당 등과 같은 기본 권리를 알려주는 고등학교도 있다지만 여전히 극소수다. 이런 사항이 궁금한 분들은 ‘노동자 권리찾기’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찾아보시길 권한다. 근로시간, 휴일, 근로계약, 실업급여, 해고 등 취업부터 퇴직까지의 대상별 사례는 물론 임금 계산기를 통해 통상임금, 시간외근무수당, 실수령액, 퇴직금, 실업급여까지 계산해볼 수 있어 유용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의무 교육과정에 노동 관련 교육을 포함시켜야 한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법의 틀 안에서 보호받는 권리를 제대로 알 당연한 자격이 있으며, 그 자격을 누리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국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최저임금 5580원”만큼은 아이돌 가수보다 국가가 먼저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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