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는가

2016.03.01 21:08 입력 2016.03.01 21:23 수정
정은경 | 문화평론가

요즘 방영되고 있는 TV 프로그램 <최고의 사랑>을 챙겨 보고 있다. 그리고 가급적 남편과 함께 시청하려고 한다. 김숙·윤정수 커플의 ‘가모장숙 놀이’가 정말 통쾌하기 때문이다. ‘가모장숙, 퓨리오숙’이라 불리는 김숙의 말들이 어록이라 불릴 만큼 여성들에게 갈채를 받고 있는 것은 “남자 목소리가 어디 담장을 넘어” “남자가 조신하게 살림이나 해야지” “집에 남자를 잘 들여야 한다더니” “여자가 하는 일에 너무 토를 달아” 등의 일갈이 그간 축적된 여성의 불만을 해소시켜 주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박장대소에는 너무도 당연시했던 가부장적 관습에 대한 문제제기와 통렬한 전복에 대한 환호가 담겨 있다. 불편해하면서도 함께 낄낄대던 남편이 다음날 아침 슬그머니 널린 양말짝들을 빨래통에 넣는 걸 보면, 이에 대한 교육적 효과도 적지 않은 듯하다.

[청춘직설] 여자는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는가

나는 결혼 전까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학교를 다니면서, 사회적 접촉이 적은 공부를 하면서 대체로 일상적으로 여성이기를 강요받거나 상처받은 적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그 중에는 시대적, 환경적 요인도 있겠다. 중·고등학교 때는 여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자각’할 기회가 적었고, 남성 비율이 절대적이었던 대학에서는 여성성을 억압받았기 때문에 대체로 ‘남성’을 흉내 내면서 어정쩡한 중성으로 길들여진 듯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젊은 시절에 ‘여성성’은 일종의 숭배와 매혹의 대상이기 쉽기 때문에 그 안에 숨겨진 차별성과 불평등을 분별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은 그러한 숭배와 사랑의 ‘여성성’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아내’라는 성역할을 각인시켰다. 혼자 살 때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 한 잔을 내려서 책상 앞에 앉는 것이 첫 일과였다. 결혼 후 처음에는 사랑과 배려로 시작한 아침의 협동가사였으나 어라, 어느새 나만 홀로 개수대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이후 가사 살림은 혼자 살 때처럼 작업하다가 골치 아프면 하는 기분전환용 휴식이나 운동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매일 일정한 시간과 노동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자 슬그머니 약이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한 갈등으로 번지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의 생활에 필요한 가사노동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어느 정도 포기하면 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 여자들이 폭발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각하는 것은 대체로 출산 이후이다. 가사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데다 육아란 절대적으로 여성의 몫이 크기 때문이다. 아무리 남자가 노력한다 해도 보조자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여성은 출산과 육아 이후, 가장 뚜렷하게 자신의 여성성을 인식하게 되고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직장에서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다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육아와 가사일을 떠안으면서, 백 번도 더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면서 여성은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성 정체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여자도 음식을 잘 하지 않는다. 애초에 여자도 청소를 잘 했던 것이 아니고, 많은 책들이 얘기하듯 멀티태스킹에 능하고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감정적인 동물이 아니다. 배운 바 없지만 할 수 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레시피를 뒤지고, 할 수 없이 집안 대소사를 챙기면서 소통과 돌봄에 능숙해지는 것이다. 옷을 어떻게 잘 입고, 인테리어를 어떻게 잘 하는지에 나도 무능할 뿐 아니라 보통 남자들처럼 관심도 없다. 나도 엄마가 과일을 깎아주기 전까지는 챙겨서 먹어본 적이 없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와 아이가 잠 깨는 소리에 귀가 열리는 것은 훈련에 의한 것이지 선천적인 재능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해낸 직장일의 질은 어떠할 것인가? 전력질주나 올인하지 못하는 직장에서 여성은 보조적 역할을 강요받거나 중요한 일에서 배제되기 쉽다. 그리하여 여성은 순환적으로 또다시 직장에서 ‘여성성’을 자각하게 되는데, 이때의 여성성은 숭배와 매혹의 대상은커녕, 무능하고 주도권을 상실한 약자, 노동자의 그것이기 쉽다. 약자는 보호받으면서 배제된다. 배려 차원에서 지하철에 노약자석이 생기자 다른 좌석 앞에 다가오는 노약자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된 것처럼.

‘밥그릇’과 헤게모니 앞에서 남자들의 우선권은 당연시되고, 여자들은 대체로 0.5인분의 역할을 요구받게 된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합의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여자들은 그 지정석에 앉게 마련이다. 기대치에 대한 순종에서 빚어지는 훈육은 시댁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더욱 강고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버르장머리 없는 며느리’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예의와 배려에서 수행된 숱한 며느리의 역할은 여성을 페미니스트로 유혹하는 중요한 고리다.

요컨대 한국 여성은 결혼과 출산, 직장과 시댁이라는 거대한 사적·공적 공간에 내재된 가부장제를 경험하고 체계적으로 훈육되면서 페미니스트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게 된다. 집 안팎에 편재된 이 가부장제의 관습과 기대치를 어떻게 전복하고 배반할 수 있을까. 이를 함께 고민하고 바꾸지 않는다면, 출산율 1.24명이라는 초저출산국이라는 오명도, 비혼 여성의 증가와 삼포세대의 청년 문제도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 보조나 약자의 위치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지 않는다면, ‘가모장숙’의 가부장제 미러링은 웃자고 한 농담이 아니라 웃을 수 없는 ‘사실’의 차원이 될 때까지 한국은 이 기이한 역할놀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자들은 집안일 하는 남자일을 너무 몰라줘요’라는 남자들의 하소연이 보편화할 때까지? 너무 극단적인가? 이게 극단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 딸들의 미래에 대해 기대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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