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질하는 어른에 거울을 들이밀어라

2016.02.23 20:59 입력 2016.02.23 21:02 수정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

육아 책을 즐겨 읽는다. 얼마 전엔 김신숙님이 쓰신 <할머니의 꽤 괜찮은 육아>를 보았다. 연륜과 겸손, 열정이 같이 느껴지는 귀한 책이었다.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저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존경했던 어른은 많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이이고, 상대방이 어른이기 때문에 억지로 따른 적이 더 많았지요. 어린아이 눈으로 봐도 본받고 싶은 어른과 그렇지 않은 어른은 구별이 됩니다. 그들의 행동, 말투, 태도 등을 통해 알아차리게 되지요.”

[청춘직설] 손가락질하는 어른에 거울을 들이밀어라

요즘 아이들에게 어른은 어떤 존재일까. 존경하는 어른이 있을까. 어른이 되고 싶을까. 아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노골적으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사실 어른들처럼 살기 싫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어른으로 살아가는 게 아이들 눈에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학원에 치이며 사는 한 초등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학원 다니는 게 정말 회사 다니는 것처럼 힘들어요.” 물론 아이는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다. 다만 회사가 이렇게 힘들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저녁이 없는 삶은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른에게 야근이 있다면 아이들에게는 야간자율학습 또는 학원이 있다. 나중에 하고 싶은 게 있는지 아이에게 물었더니 아이는 무덤덤하게 “회사는 못 다닐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어른은 그나마 낫다. 아이들은 때로 어른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 최근 어느 고교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러 나온 그 학교의 이사장은 “작년, 재작년만 해도 서울대와 연세대·고려대·이대·숙대에 간 학생이 50~70%에 달했는데 올해는 여기서 3분의 1도 안 된다”는 말을 꺼냈다. 그간 학교에 쏟아부은 액수가 200억원이라며 “선생님들이 잘못 가르친 탓이냐. 졸업생들에게 정말 실망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떤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정도 환경을 마련해줬으면 됐지. 나는 정말 아무 도움도 없이 이 자리까지 왔는데….” “내가 어떻게 자기들 뒷바라지를 해왔는데아무 노력도 안 하고….” 상담실에서 부모들에게 듣는 이런 말들이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

문득 에이미 추아와 제드 러벤펠드가 쓴 <트리플 패키지>가 떠올랐다. 부부인 두 사람은 미국 내 몇몇 소수민족의 성공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우수하다는 믿음인 우월 콤플렉스, 자신의 우수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불안, 미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현재를 희생할 줄 아는 충동 조절, 이 세 가지 유전자를 갖춘 집단이 성공한다는 것이다.

시험 성적과 입시 결과로만 모든 것을 재단하는 어른들의 말에 ‘트리플 패키지’ 이론을 뒤집어씌우면 다음과 같다. ‘우리 학교는(또는 우리 집안은) 원래 굉장히 우수한데 너희들은 그에 한참 못 미치는 부족한 결과를 가져왔다’, ‘탁월함을 입증하지 못한 것은 너희들 탓이다’, ‘너희의 노력 부족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이들은 대개 자신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는 듯 행동하지만, 사실 가장 큰 잘못은 자기 안에 있던 수치심을 아이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아이들이 느낀 모멸감은 사실 어른 안에 있던 것이다. 때로 어른들은 자신이 소화해야 할 감정을 아이들에게 떠넘기기도 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지만 특히 우리와 같은 집단주의 문화에서 더 흔하게 나타날 소지가 있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우리’의 우수성을 드높이는 건 칭송받을 만한 일이지만 ‘나’를 내세우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자신을 낮추고 공은 타인에게 돌려야 한다. 일이 잘되면, 훌륭한 시스템과 전통, 좋은 선생님, 상사, 부모 덕에 잘된 것이다. 하지만 잘못됐을 때의 책임은 여전히 개인을 향해 있다. 윗사람들은 수치심을 쉽게 어린 세대에 전가하고 자신들은 쏙 빠져나간다. 이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쉽게 자책에 빠져들고 낮은 자존감 문제에 시달린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만약 나에게 축사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앞으로 살아가다 보면 너희들 기분을 망치기 위해 온갖 이상한 말을 던지는 어른들을 만나게 될 거야. 그때 나는 너희들이 스펀지가 되지 말고 거울이 됐으면 좋겠어. 흡수하지 말고 반사해버려. ‘그건 당신네들 부끄러움이지 내 부끄러움이 아니야. 나는 내가 한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라고 외쳤으면 좋겠어. 너희가 이 땅에서 지금껏 살아온 것 자체가 성취라는 걸 잊지 마.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큰 성취야.”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