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과 인간관계

2016.04.10 21:01 입력 2016.04.11 00:55 수정
정희진 | 여성학 강사

대화 중에 아는 사람이 나오면 “세상 참 좁다”고들 한다. 한국에서는 3.4명, 세계적으로는 7명을 건너면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도 있다. 정말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이 좁다는 것은 그만큼 ‘끼리끼리’ 사회라는 의미다. 폐쇄된 집단 안에서의 삶. 종친회, 동문회, 재벌들 모임, 고교 학군, 대학 입학 학번, 동종 업계, 사회운동가들까지. 아는 사람이 많으면 세상이 좁게 느껴지는 법이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헌법과 인간관계

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을 때 세상은 황량할 정도로 넓다. 70억명이 넘는 지구상 인구 중에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지구촌 시대라 해도 사람들은 지역, 계층, 성별 등으로 분리되어 있다. 사는 방식도 제각각, 통념 밖의 라이프스타일도 많다. 아동 학대부터 권력층의 초대형 부패까지 우리를 놀라게 하는 뉴스들은 그만큼 세상이 넓다는 증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옆에 있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무적자(無籍者), 이주자의 일상을 알지 못한다. 서울 토박이, 중산층, 40대 여성이 대부분인 내 주변의 ‘얌전한’ 친구들의 아는 사람 범위는 아무리 건너 봤자 거기서 거기다.

우리 사회에서 아는 사람이 형성되는 대표적인 구조는 학연이다. 평준화 이전에는 ‘KS’, 그리고 최근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학벌은 곧 계층이 되었다. 인맥, 네트워크, 연대 등 이름은 다양하지만 결국 사적인 이익을 위한 연줄, 언제든 끊거나 이을 수 있는 안면몰수의 이해관계다. 문제는 다양한 계층의 ‘아는 사람 집단’이 목소리를 내는 사회가 아니라 ‘TK’ ‘SKY’ ‘관피아’ ‘와스프(WASP·미국의 백인 주류 계층)’처럼 특정 집단이 자원을 독점하고 아량을 나누고 자기들만의 구획된 공간에 살면서 “세상이 좁다”고 경탄(?)한다는 점이다. 좁은 것은 그들 삶이지 세상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불공정한 규칙조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이다. 세습된 ‘족보(학벌)’를 중심으로 한 남성들 간의 인간관계가 좌우하는 사회다. 돈 없고 배경 없는 이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사건. 비록 부패 기업인이었지만 “초등학교 중퇴의 신문배달 소년”이 자수성가하기까지 경험은 어땠을까. 그는 평생 식사를 혼자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식사하는 것이 즐거운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인생이다. 타고난 사교적 성격이라 해도 어떻게 평생 비즈니스로 식사를 했단 말인가.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완구의 인간관계’에서 간단히 배제되자 죽음을 선택했다. 그의 좌절과 원한은 가진 자들의 완강한 배타성을 보여준다.

영화 <내부자들>의 내용처럼 남성들만의 관계, 남성 연대가 사회를 질식시키는 현상을 동성사회성(同性社會性·homosocial)이라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몇몇 남성 빼고는 모든 사람이 모욕과 스트레스, 실질적인 피해 속에 살아가야 한다. 세계 최고의 술, 담배 소비량은 인간관계의 전초인 회식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회식 현장에서의 소비 그리고 회식 이후 스트레스로 인한 소비.

이번 새누리당 공천에서 대통령의 심중을 대변한 조원진 의원(대구 달서병)의 발언, “헌법보다 인간관계”는 명언 중의 명언(銘言)이다. 가슴을 후비며 새겨진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성격을 명료하게 정의한 ‘학자’는 당분간 등장하기 힘들 것이다. 그가 다시 국회의원이 된다면(아마도 되겠지만),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민심의 지지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군신관계, 법치와 인치(人治)라는 봉건성과 근대성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라 해도, 절차가 있고 룰이 있는 법이다. 기원전 한나라의 무제(武帝)도 사마천에게 사형을 내리기 전에 죽는 방법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그 유명한 궁형(거세형)을 택한 이야기다.

조 의원의 발언은 헌법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 아니다. 규범, 상식, 최소한의 약속 등 인간의 사회성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상이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나온 것이다. 두려운 것은 이들 인간관계의 힘이다. 기득권 세력은 관계로 살아가고, 나머지 국민은 법대로 살아야 한다. ‘인간관계’는, 법 위를 활보하는 이들과 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겁박이 통하는 이들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혼란시킨다. “헌법보다 인간관계”는 모순 어법이지만 현실이다. 이 발언이 막말인 것은 옳지 않아서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최소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암묵을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선거철에.

절실한 삶의 조건, 우리는 인간관계 없이 살 수 없다. 관계가 곧 ‘나’ 자신이다. 배려와 존중, 친밀감, 인정이 우리를 살게 한다. 행복하려면 성숙한 인간관계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원리는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때만 “인간관계”라고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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