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댕이 골목의 역사

2016.05.05 20:52 입력 2016.05.05 20:55 수정

경인선 전철의 끝은 인천역이다. 그런데도 인천 토박이들은 ‘하인천역’이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제일 끝 역이기도 했고, 상인천역이 과거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구별해서 불렀던 것 같다. 인천역을 끝으로 해서 이어지는 인천의 ‘원도심’은 개항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본디 한적한 어촌이었던 이 지역이 개항의 물결을 타고 격랑의 세월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일본인들은 항구로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날랐고, 박래품(舶來品)으로 상징되던 서구의 새로운 물량이 쏟아져 들어왔다. 임오군란의 분노한 군인들을 피해 일본 군사고문단이 도망친 항구도 이곳이고, 청의 장수 오장경이 수천의 병사를 이끌고 진입한 곳도 여기다. 개항은 조선의 운명을 뒤바꿔놓았고, 여기 역사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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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인천은 수도권의 제일 중요한 항구로 성장했다. 부두에는 하역 노동자들로 붐볐다. 이들은 고단한 하루를 한잔의 술로 씻어냈다. 공업지대가 생겨나면서 인천은 노동자의 도시가 됐다. 굴뚝이 치솟았고, 사내들이 술과 음식을 찾았다. 인천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하인천역’ 맞은편은 북성동과 선린동이다. 높직한 언덕 입구에 화려한 색깔의 패루가 서 있다. 패루를 통해 차이나타운으로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골목이 하나 비껴서 있다. 밴댕이 골목이다. 부두노동자들과 인근의 거대한 산업시설 노동자, 역앞의 날품팔이 막일꾼들이 목을 축이던 곳이다.

인천의 가난한 문화예술인들도 한 패가 되어 술잔을 꺾었다. 인천의 오랜 술꾼들은 신포동 일대의 다복집, 신포주점, 항아리집, 대전집 같은 노포들과 이곳의 밴댕이 골목을 제일로 쳐준다.

이 골목의 터줏대감은 수원집이다. 본디 인민군집이라는, 이름도 특이한 밴댕이집에서 일하던 신태희씨(74)가 아내 서씨와 함께 독립하여 차린 집이다. 인민군집은 사라지고 수원집만 남았다. 과거에는 손님이 끊임없이 들이닥쳤다. 밴댕이는 무진장 잡히는 가장 싼 생선이었다. 인천 노동자들의 소중한 단백질이었고, 제일로 만만한 안줏감이었다. 포를 뜨지도 않고 뼈째 썰어서 초장과 함께 냈다. 막걸리와 약주, 막소주를 팔았다. 노동자들이 앉지도 않고 선 채 팔뚝을 드러내고 술잔을 들이켜고 밴댕이를 씹었다. 너무 바빠서 주문 후에 밴댕이를 썰 시간이 없어 미리 썰어놨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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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는 술 한 되에 1000원, 밴댕이는 3000원 남짓이었다. 인천과 황해도 사투리가 들리던 술청의 흥청거림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득실거리던 노동자들은 보기 어렵다. 대신 옛 단골들이 간혹 들러서 수원집의 역사에 한 줄 기록을 더해주고 있다. 서씨가 썰어내는 솜씨는 여전해서 날카로운 한식 식도로 번개처럼 병어와 밴댕이를 담아낸다. 얼마나 많이 생선을 썰었는지 파여서 버린 도마와 날이 닳아 폐기된 칼이 셀 수도 없다고 한다. 영화롭던 시절에 항아리에 저장했다가 주전자로 떠내서 팔던 약주는 없고 대신 소주를 마신다.

운이 좋으면 좀처럼 볼 수 없는 준치회를 먹을 수 있다. ‘단오 준치’라고, 딱 먹을 철이 온 셈이다. 아이들 다 공부시키고, 느긋하게 단골들을 기다리는 이 부부의 주름살이 보였다. 밴댕이와 준치 살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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