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잣국의 전설

2016.05.12 21:02 입력 2016.05.12 23:21 수정

노동자의 음식이라면, 흔히 국밥이다. 빨리 먹고 얼른 일할 수 있는 음식이다. 해장국도 국밥의 하나다. 고깃점 대신 뼈로 끓였다. 소뼈와 선지, 우거지를 넣은 해장국이 서울과 인천에서 유행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이런 음식이 인기를 끌었다. 인천은 개항도시였고, 서울과 함께 전국에 두 개밖에 없는 미두취인소(쌀 선물거래소)가 사람과 돈을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감잣국의 전설

돈과 물자가 몰리면 노동자들도 많아진다. 허룩한 속을 한 그릇의 뚝배기로 달랬다. 소 말고 돼지뼈로도 해장국을 끓였다. 흔히 감자탕이라고 부른다. 소뼈 해장국과 달리 별다른 역사적 기록이 없다. 옛 신문을 봐도 감자탕은 일제강점기까지 감자로 만든 설탕(감저당·甘藷糖·전분에서 당을 추출해낸 것)을 뜻했다. 1970년대 초반에야 감자탕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흔하지 않다. 이유가 있다. 본디 감자탕은 감잣국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감잣국은 1960년대 기록에 이미 나오기 시작한다. 그때는 다 그렇게 불렀던 까닭이다. 감잣국은 감자탕보다 뭔가 더 가볍고 부드러운 음식의 느낌이다. 그러던 것이 ‘탕’으로 바뀐다.

탕이라고 하면 펄펄 끓고 뭔가 보양의 느낌이 있으며, 진한 맛을 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옛날 감잣국은 요즘 같은 전문점이 거의 없었다. 실비집이라고 불리는 대폿집이나 대중식사점에서 메뉴의 하나로 취급했다. 어려서 동네 실비집에서 ‘여름이 되면 감잣국 개시’라고 써 붙여 놓던 기억이 난다. 저장감자가 없던 때라 감자 수확철에 맞춰 감잣국을 내었을 것이다. 감잣국이 어떻게 상업적으로 전문점의 메뉴가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전라도 쪽의 농민이 대거 서울로 몰리던 1960년대에 향토음식의 하나로 같이 상경했다는 설이 있다. 인천 유래설도 있다. 다만, 1958년에 이미 서울 돈암동에서 부암집이라는 식당을 연 충북 진천 출신의 이두환씨가 콩비지와 함께 감잣국을 팔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집은 태조감자국으로 개명하고 3대째 물림하여 성업하고 있다. 서울시로부터 ‘서울미래유산’ 인증도 받았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감잣국의 전설

감잣국은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통금이 없어지고 서울시민의 라이프 사이클이 바뀌었다. 심야에 움직이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청진동에서는 소뼈 해장국이 팔리고, 영등포와 용산, 신촌 같은 부도심에서는 감잣국이 인기를 끌었다. 배고프지 않게 넉넉하게 넣어주는 감자가 일품이었다. 감자값이 오르면서 감자 없는 감잣국이 나오기도 했다. 손님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뼈해장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감잣국의 감자는 실은 돼지의 뼈를 뜻하므로, 감자가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낭설도 돌았다. 다시 말하지만, 감자뼈라는 돼지뼈는 없다. 감자탕용 돼지뼈를 줄여서 그냥 ‘감자뼈’라고 부르는 통에 생겨난 오해 같다. 감잣국에 들어가는 뼈는 돼지의 척추가 온전하게 쓰인다. 목뼈, 등뼈, 꼬리뼈가 포함된다. 감잣국(감자탕)집이 전국적으로 많아지면서 요새는 국내산으로 수요를 충당하지 못해 많은 양을 수입한다. 과연, 뼈 좋아하는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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