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민-농민 백남기

2016.09.28 20:37 입력 2016.09.28 20:50 수정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기어이 저세상으로 그이는 갔다. 뇌가 심하게 손상되어 317일이나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다가 국가로부터 아무런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채 영영 불귀의 객이 되었다.

사과는커녕 소위 공권력은 이제 와서 부검을 하겠단다. 천하가 다 아는데도 오직 대한민국 경찰만은 그가 왜 죽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겹겹이 차벽을 쌓아놓고 거기로 접근한다고 무지막지하게 물대포를 쏘아댄 당사자 자신이 말이다.

[김종철의 수하한화]자유시민-농민 백남기

어쩌다가 대한민국이 이렇게 형편없는 저질국가로 전락해버렸을까? 이런 나라에 정말 희망이라는 게 있을까? 문득 120년 전 나라를 구하려고 궐기했다가 반동적인 지배층과 외국군대에 의해서 무참한 학살을 당했던 동학농민군을 생각해본다. 그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면서 염원했던 ‘좋은 세상’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이었을까?

그리고 망국의 한(恨)을 품고 낯선 땅, 낯선 거리에서 풍찬노숙의 쓰라린 세월을 감내하며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이 생각했던 새 나라는 어떤 것이었는가?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그분들이 임시정부를 세우고 집단지혜를 모아서 설계한 것이 ‘대한민국’이었고, 그 정체(政體)는 ‘민주공화국’이었다. 그러니까 독립투사들의 주권회복 운동은 왕조를 부활하자는 게 아니라, 민중이 나라의 주인으로, 자유인으로 사는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동시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지는 운명을 강요당했고, 곧이어 동족끼리의 참혹한 전쟁, 그리고 오래 지속된 독재체제와 분별없는 산업화, 난폭한 ‘개발’ 때문에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은 한순간도 편할 날 없이 끊임없이 멍들고 파괴되어왔다. 그럼에도 동학농민군과 항일독립투사들의 정신은 이 나라 백성의 혈맥 속에 잠복된 형태로나마 어떻든 죽지 않고 살아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결과,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불충분한 대로 ‘민주화’를 성취하기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이제는 고개를 들고 떳떳한 자유인으로, 인간답게, 위엄 있게 살 수 있게 됐다는 자부심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서 남북 간의 대화·화해·협력의 길도 어느 정도 열렸고,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천신만고 끝에 이룩한 이 모든 가능성이 언젠가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다시 캄캄해져버렸다.

경악할 것은, 반동적인 군사쿠데타 따위가 아니라 민주화의 산물인 직선제 ‘선거’의 결과로 이 모든 역사적 퇴행이 진행돼왔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역사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은 소수 지배층의 시대착오적인 무지와 탐욕 때문만이 아니라 상당수 민중이 그들을 무조건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오늘의 한국 정치가 다수 민중의 뜻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개탄하지만, 정치를 좌우하는 지배층 자신은 그런 비판에 괘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늘 고정 지지층이 존재하고, 전파력이 큰 대중매체가 항상 자기들 편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강자들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강자숭배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 현상의 궁극적인 원인은 인간존재의 나약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힘없는 자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다가 보면 결국은 강자 편에 서는 게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자기보호 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드 배치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는 성주의 참외 생산 농민에게 서울에 살고 있는 어느 노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노인은 참외 박스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연락한다면서 “사드 배치를 반대하면 서울 지역 노인단체들과 참외 불매운동을 벌이겠다. 수도권에는 1000만 인구가 산다. 성주 인구는 몇만명도 안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시사IN>2016·7·30). 그러니까 서울의 노인도 사드를 배치하면 누군가가 ‘희생’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돼야 한다는 파쇼적 논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다. 그는 성주의 농민들이 단순히 참외를 재배하여 생계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들이라는 점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지금 성주 사람들이 분개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를 국민과도 국회와도 상의 없이, 그리고 현지 주민들에게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최고 권력자 맘대로 결정하는 위헌적·독재적인 처사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주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자유시민’임을 천명하고, 정부에 헌법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그들은 ‘불매운동’ 운운하는 저 서울의 노인(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자유시민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들은 피해자의 아픔을 나누려 하고, 혹은 최소한 미안해하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고 윽박지르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주의와 파시즘을 뒷받침하는 논리, 즉 노예들의 논리이다.

나는 백남기 그이를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오랜 지인과 동지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는 이 나라의 그 어떤 ‘애국자’나 지사보다도 지독히 향토를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평생을 보낸 분이었다. 반독재 투쟁에 용기 있게 참여하여 감옥살이까지 한 청년기의 경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서울에서 어엿한 대학을 나왔으면서 몰락일로에 있는 농촌으로 들어가 한평생 동지들과 함께 ‘좋은 농사’를 통해서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불철주야 헌신했던 삶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는 농사야말로 천하지대본이라는 진리에 충실했던 농민이자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운 진정한 ‘자유시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농사를 우습게 여기는 자들의 무지몽매함을 깨우쳐주기 위해 때때로 거리에 나섰지만, 국가는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끝내 무자비한 폭력으로 그를 쓰러뜨렸다. 누군가의 말처럼 티끌만큼의 “이성도, 상식도, 양심도 없는” 나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