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측근

2017.02.15 21:06 입력 2017.02.15 21:10 수정

[역사와 현실]왕의 측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사극에 국왕이 가까운 신하와 독대하는 장면이 가끔씩 나온다. 이런 일은 조선시대에 실제로 가능하지 않았다. 국왕은 복수의 사람들에게 늘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 각자의 임무와 성격이 달랐는데, 그 임무와 성격의 구성이 조선왕조 권력의 단면을 보여준다. 왕 주변에는 크게 5개 그룹이 있었다. 왕이 심정적으로 가깝게 느끼는 순서로 따지면 내시, 승지, 대신, 언관, 사관이 그들이다.

내시(內侍)는 원칙적으로 국왕의 사적 요구에 응하는 존재였다. 국왕의 개인적 사정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왕에게 ‘노(No)’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에게는 어떤 공적 역할도 맡겨지지 않았다. 국왕에 대한 사적인 보필 이외에 그들은 아무런 책임도 요구받지 않았다.

[역사와 현실]왕의 측근

승지(承旨)는 승정원에 소속되었고 모두 6명이었다. 정3품 벼슬이고,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 비서관들이다. 이들 임무는 ‘국왕의 말을 정부조직과 연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6명의 승지는 정부조직인 6조 중 하나씩과 연결되었다. 수석승지인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와 연결되는 식이다. 조선시대에 내시나 승지들이 일으킨 정치적 물의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의 ‘정치적’ 역할이 전혀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물의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눈에 잘 안 띈다.

대신(大臣)은 주로 3명의 정승과 6명의 판서를 가리킨다. 각각 정1품과 정2품의 최고위 관직자들이다. 관직자들로서 국정현안을 실무적으로 책임지는 사람들이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 사이에 대과(大科)에 합격한 후, 말단에서 시작하여 적어도 50세가 넘어야 도달할 수 있는 자리이다. 이들 역시 가능하면 국왕 의견을 존중했다. 하지만 이들의 임무는 내시는 물론이고 승지와도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들은 때로 왕의 의견에 반해서 ‘안됩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국왕의 명령이기에 따랐다고 말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국왕과 의견이 다르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조선 조정의 원칙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어찌 그때만의 원칙이겠는가. 자기 몫의 책임이 있기에 안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이 남긴 방대한 기록 덕분에 왕에게 영합하여 책임을 못한 대신이 누군지 지금도 확인이 가능하다.

내시, 승지, 대신이 정도 차이는 커도 국왕 의견을 존중하는 쪽이라면, 언관과 사관은 국왕에게 불편한 존재들이다. 언관(言官)은 명칭 그대로 바른말 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관리로,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강경한 야당 성향 언론, 검찰 및 감사원에 해당한다. 지금과 다른 것은 대신과 국왕에 대한 비판이 언관의 중심 업무였다는 점이다. 두 기관의 중추는 4~6품 정도의 관리들이다. 이들은 거의 대과 출신 엘리트들이고, 나이는 주로 30대가 중심이었다. 대신과는 부모·자식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났다. 이들은 그 나이와 스펙으로 인해서 무례할 정도로 원칙적이었다. 그들은 아직 젊고, 승진 때문에 높은 사람에게 신세진 적이 없고, 똑똑한 젊은이가 대개 그렇듯 이상적이었다. 국왕의 주변에는 늘 그들이 있었다. 조선은 언관을 왕 옆에 둠으로써 권력에 대한 견제와 국정운영 원칙에 대한 끊임없는 환기를 제도화했다. 연산군 대에 사간원이 폐지되고 사헌부 기능이 크게 위축되었던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조선 조정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관들에는 그 운영과 회의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있었다. 국왕이 참석하는 모든 자리에도 그들이 있었다. 사관의 중심축을 이루는 관리들은 이제 막 대과를 통과한 7품에서 9품까지의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언관들처럼 국왕을 상대로 언성을 높이지도 집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국왕의 말과 행동을 묵묵히 기록했다. 그 기록은 매년 차곡차곡 쌓였지만 국왕은 그 기록을 보지 않았고, 사관들도 왕에게 보고할 의무가 없었다.

사관의 기록 행위는 언관의 발언 못지않게 국왕을 강력히 견제했다. 연산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책뿐이다. 사관은 정부 관련 일만 기록해야 한다. 임금과 관련된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이제 이미 사관에게 임금에 관한 일을 쓰지 못하게 했지만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연산군일기>12년 8월14일) 연산군이 이 말을 하고, 보름쯤 후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언관 조직이 복구되었고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조선 국왕은 이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왕 노릇을 해야 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을 만약 조선의 왕이 듣는다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런 덕분에 조선은 장수할 수 있었다. 14세기에 성립하여 20세기까지 지속된 왕조는 세계적으로도 조선이 거의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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