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삶

2022.12.15 03:00 입력 2022.12.15 03:05 수정

‘나도 정치병 환자인가?’ 가까운 지인들이 가끔 정치 과몰입을 지적할 때면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SNS나 칼럼 등의 글에서 감정이 들끓는 정치적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경우가 많아서일 텐데, 그럴 때마다 나는 살아가는 일이 다 정치인데 어찌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겠느냐며 대충 화살을 피하곤 한다. 속으로는 ‘이 신나고 흥분되는 일을 어찌 멈추라는 거냐’고 중얼거리지만.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그렇다. 비록 말이 전부이긴 하지만 정치에 관여하는 데서 희열과 보람(?)을 느끼는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를 피곤하다고 말하고 짜증스러운 정치놀음으로부터 일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두 부류에는 공통점도 있는데, 양쪽 다 정치를 눈앞에서 벌어지는 시끄럽고 뜨끈뜨끈한 현실 정치의 의미로 쓴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삶이 곧 정치라고 할 때의 정치는 그보다 훨씬 크고 넓은 무언가를 뜻할 텐데 말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는 정치 과몰입층이든 무관심층이든 몰정치적인 것은 다르지 않으리라. 진영으로 갈려 상대에 대한 비판과 권력의 향방에만 골몰한 정치가 오히려 우리를 몰정치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가 무엇인지 묻는 한 권력자의 물음에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政者正也)라고 명쾌하게 정의한 바 있다. 정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실천의 문제이지 힘과 이익의 다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옳은 것(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본래 목적을 잊고 그저 권력이라는 수단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진영의 논리가 앞서는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모두 대결의 논리로 빨아들인다. 가령 현 정부의 반민주, 반헌법적 통치를 비판하면 바로 상대 진영의 주장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정치가 이렇게 진영 선택의 문제가 되고 권력 교체에 불과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협소하고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의 양당제 정치 때문일 것이다. 선거가 곧 정치가 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선택과 상상의 여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정치 과몰입도 몰정치도 아닌, 마음 놓고 지지할 정치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 정의했는데, 여기서 ‘정치적’이란 말은 정확하게는 폴리스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는 인간의 활동을 이론적 활동(테오리아), 윤리적 실천(프락시스), 제작 활동(포이에시스)으로 나누면서 생존을 위한 활동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활동 곧 프락시스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생각을 일부 이어받은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활동을 생존을 위한 노동(labor), 외부 세계에서 의미를 캐내는 작업(work),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action)로 나누면서, 근대에 들어와 행위의 공적 영역이 생존과 노동의 사적 영역에 잡아먹혔다고 지적한다. 공적 영역이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권력의 사유화로 증발해버리고, 시민들은 그들대로 개인의 사적 안녕이라는 몰정치적 태도에 빠진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공적인 정의 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이상은 또한 현실 정치를 통과하지 않으면 달리 실현할 방법이 없다는 데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현실 정치를 방기하면 정치의 이상은 더욱 멀어진다. 예컨대 내가 사는 고양시에서는 부동산 포퓰리즘을 흔들어댄 후보가 시장에 당선된 결과 돌봄센터, 지역아동센터, 도시재생, 취약계층 지원, 문화예술 지원 예산이 모조리 깎이거나 전액 삭감되고 있는 중이다. 사적 영역에 붙들린 유권자들의 정치적 관심이 공적인 영역에서 고스란히 죄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피곤하지만 정치를 놓을 수 없는 것이 시민의 삶이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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