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청원’이라는 슬픈 광기

2017.09.03 10:58 입력 2017.09.03 21:06 수정

박근혜 정권의 무너진 ‘적산(敵産)가옥’ 위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긴 항해를 거친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더 이상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진사퇴를 불러온 몇몇 인사의 경우, ‘진보 지도층’의 생각지 못한 면모를 보았을 뿐, 완벽한 정부는 없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베스트 청원’이라는 슬픈 광기

특히 대통령 개인의 인간적 매력과 가치관이 현 정권의 엔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전 사안에 대한 입장은 놀라울 정도다. 세월호, 5·18,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등 고통받는 이들을 대하는 그의 위로와 공감 능력은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서 최고 통치자’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우리는 알고 있고, 잊을 수 없다. 그 역시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는 것을.

‘경남도민일보’는 문재인 정부의 3중고를 ‘야당, 추미애, 탁현민’으로 꼽았었다(7월11일자, 인터넷판). 국민의당이 대선 당시 제보 조작 사건을 이유미씨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자 추미애 대표가 “머리 자르기”라고 발언, 막말 논란을 겪을 때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문재인 정부의 ‘2중고’가 있다면, ‘적폐(특히 MB세력)’의 효과적 정산(正算)과 열렬한 지지층인 이른바 ‘문빠’로 인한 중간 지지층 이탈이다.

하지만 전자는 조사, 처벌 대상이므로 골칫거리가 아니라 국정 그 자체다. 문제는 후자다. 이들의 집단행동은 ‘홍위병’으로 오해(?)받을 만큼 과격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개혁세력이 이들로 인해 언로가 막히고 자기 검열에 갇힌다면? ‘문고리 3인방’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나부터 ‘문재인 팬덤’ 때문에 두려움과 피로를 느낀다. 되도록 현실 정치에 관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에 대한 청와대 청원 사건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다.

그간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정현백 장관은 인사청문회 당시 탁현민 행정관에 대한 입장을 요구받았고 “그의 여성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대통령에게 경질을 건의하겠다”고 답변했다. 청문회를 주도했던 김삼화 국민의당 의원은 오랫동안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전문가다. 8월22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운영위원회에서 “대통령의 인사권이 존중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정 장관께서는 (탁 행정관에 대해) 듣는 소리를 충분히 잘 전달해 주셨다”고 발언했다. 28일, 정현백 장관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퇴 의견을 전달했지만, 무력했다”고 말했다.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정 장관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하고 자신의 권한인 양 호도하며 (중략) 망동을 거듭하고 있다, 탁 행정관을 흔들지 말라”면서 장관 경질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 글은 ‘베스트청원’으로 분류되었다.

일부 언론은 “기이한 청원”(‘허핑턴포스트코리아’), “부적절한 처신이나 책임을 이유로 장관 사퇴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논란의 인물 해임을 건의한다는 이유로 장관을 경질하자는 국민 청원은 드문 일이다. 장관의 ‘충언’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심사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논평했다(서울신문 사설).

두말할 것도 없이, 정현백 장관은 여성가족부 수장으로서 당연한 업무를 수행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는 물론이고, 한시적이었지만 2005년 출범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와 같은 부처는 정부(GO) 내부의 비정부기구(NGO)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는 본래 임무가 청와대를 포함, 국정 전반의 인권과 성 인지(性 認知) 의식을 감시, 교육하는 것이다. 준(準)정부기관(Semi-GO)으로도 불린다. 이들이 다른 부처와 갈등을 빚는 것은 필연이며, 이는 일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다.

장관이 국민과 야당의 입장을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 해임 사유라니….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문제는 이번 청원의 발상이다. 나는 ‘이니 팬덤’과 ‘팩트’, 상식, 원칙을 놓고 논쟁할 능력이 없다. ‘사랑’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연은 다소 복잡하지만 대통령의 외모를 문제 삼은 ‘한겨레21’ 표지 사건,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반찬 부실”에 대한 문자, 트위터 폭탄 등 그동안 온갖 웃지 못할 황망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우리 이니’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 이들에게 인신공격과 “자유한국당 프락치”라는 식의 비난을 퍼붓는다(아무리 ‘돼지발정제’를 모의했던 이가 대표인 정당이라고 해도, 자유한국당은 제1야당이며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있다).

한국 사회에 팬덤 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0년대. 서태지, H.O.T, 젝스키스의 팬들은 스타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도록 함께 불우이웃을 돕는다든가 공연장을 청소했다. 그러나 지금 ‘이니 팬덤’은, 같은 지지자들에게도 욕설을 퍼붓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인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다. 국가 운영에 이처럼 위험한 사태는 없다. 다른 사회에서는 ‘국론분열’을 넘어 내전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나를 포함해서 ‘문빠’는 지난 ‘10년 정권’에 절망한 이들이다. 동시에 이 현상은 출구 없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주가 두려운, 마음 둘 곳 없는 이들의 집단 광기다. 현 정부의 지지율에는 이처럼 슬픈 광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서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지, 자기 불안을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표출하는 ‘~빠’ 문화는 함께 살아갈 방도가 아니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청원 앞에서 분노보다 우리가 많이 초라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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